카테고리 없음

부여 백마강 낙화암 고란사 탐방

푸르미르(청룡) 2022. 10. 28. 16:21

2022년 10월 1일(토요일) 날씨 맑음  

​아내와 함께 부여의 10경 중 6경인 '백마강 수상광광'으로 시작하여 1경인 '부소산 낙화암'을  탐방하고 다시 구드레 선착장으로 돌아와 10경인 '성흥산 사랑나무'를 탐방 후 귀가하였다. 개천절 연휴를 생각도 못 하고 토요일 당일 여행을 계획하였던 것이 오산, 갈 때에는 3시간 30분이 걸렸고 다행히 올 때는 2시간 30분 걸려 귀가를 하게 되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제 68회 백제문화제가 열리는 첫날이었다. 구드레 선착장 주차장은 진입금지고 교통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주차할 곳이 구드레 선착장까지 1km 정도 되는 곳에 주차를 하게 되었다. 어찌 되었던 행사를 보러 온 목적은 아니니까 백마강변 둔치에 코스모스 풍경을 감상 카메라에 담으며 선착장에 도착한 시간이 11시 25분이었다. 

황포돛배가 조금 전 출발하여 15분 후에 출발한다고 하여 매표를 한 후 기다리다 11시 40분에 황포돛배를 타고 수상관광을 시작하였다. 인터넷과 유튜브로 보았던 백마강과 낙화암을 직접 본다는 설렘으로 출발부터 영상을 담아 보았다. 황포돛배는 선착장을 출발하여 건너편으로 운항하여 부산(浮山) 방향으로 가다가 돌아서 부소산(扶蘇山) 방향으로 틀어 낙화암을 지나서 고란사 선착장을 지나 백마교 방향으로 진행을 하다 고란사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운행 시간은 15분 정도 소요, 부여의 자랑과 낙화암의 얽힌 전설을 방송은 하지만 배 엔진 소리와 관람객의 소음으로 정확히 들리지를 않았다.

구드래 선착장 가기 전 백마강 둔치에서
구드래 선착장

https://youtu.be/Syp4lDqKj4E

 

백마강[白馬江]
옛날에는 백강, 사하(泗河), 백촌강(白村江) 부르던 백마강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소재 일반적으로 금강변 부여읍(扶餘邑) 정동리의 앞 범바위[虎岩]에서부터 부여읍 현북리파진산 모퉁이까지의 약 16㎞ 구간을 백마강이라 한다.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신무산(神舞山, 897m)에서 발원하는 금강은 서쪽으로 꺾여 흘러서 공주에 이르러 웅진(熊津) 또는 금강이 되고 유구천(維鳩川)을 합하여 남쪽으로 곡류하면서 부여군에 이르러 고성진(古省津) 또는 백마강이 된다. 금강은 백마강을 지나 논산천(論山川)을 합하고 강경을 거쳐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며 황해로 들어간다.

백마강은 소정방이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하여 용을 낚았던 바위를 조룡대(釣龍台)라 하고 강의 이름도 사하(泗河)에서 백마강(白馬江)으로 바뀌었다고하나, 백제 말기보다 1백 60여 년 앞선 무녕왕시대의 기록에 이미 금강을 ‘白江(백강)’으로 표기했던 사실이 있고 역사적으로 말(馬)을 ‘크다’는 뜻으로 써온 것을 감안할 때 백마강은 곧 ‘백제에서 가장 큰 강’ 이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하천이 대부분 하류에서 곡류하고 있는데, 백마강 유역은 금강 하류 중에 곡류가 뚜렷한 곳이다. 백마강의 범위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공주를 지나 청양군 청남면, 부여군 부여읍 및 규암면에 인접한 지역이다. 이 일대에서 백마강은 서남류하는데, 북동으로부터 많은 강이 흘러들어 부여 부근에서 지천, 은산천(恩山川), 구룡천, 금천(金川)이 합류한다. 백마강과 이들 하천이 만나는 지역에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동남부 구릉지대는 백마강 연변의 부여읍 남부와 장암면, 석성면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해발 100m 정도의 낮은 저산성 구릉지가 형성되어 있다. 남동부 저지대는 동남부 구릉지대의 남쪽, 즉 양화면, 임천면, 세도면의 금강본류 유역과 석성면, 초촌면의 석성천 유역에 발달된 충적평야지대로서, 이 지대는 중앙부 저지대의 충적평야와 근본적으로 같은 발달 과정을 거
쳐서 형성된 평야지대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백마강 [白馬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낙화암[落花巖] 1984년 5월 17일 제110호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지정
바위 위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조그마한 정자가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의하면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는 강물에 임하는데, 모든 후궁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고,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낙화암의 본래 명칭은 타사암이었는데, 뒷날에 와서 후궁이 궁녀로 와전되었고 이후 궁녀를 꽃에 비유하고 이를 미화하여 붙인 이름이 분명하다. 이 바위와 관련되어 전해오는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용담(勇談)이 많은 영주(英主)였는데, 여러 차례 신라의 여러 고을을 쳐서 천하에 그 성세(聲勢)를 높인 뒤로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날마다 궁성 남쪽의 망해정(望海亭)에서 궁녀들을 데리고 가무주연(歌舞酒宴)의 향락을 일삼았다.

좌평 성충(成忠)은 이를 근심하고 극력 간(諫)하였으나, 왕은 이 말이 귀에 거슬려 그를 옥에 가두어버렸다. 그러자 그는 마음이 아파서 죽고 말았다. 이러할 때 일찍이 백제의 침략을 받아온 신라는 무열왕 및 김유신(金庾信) 등의 영주와 명신
(名臣)이 나타나서 나라의 힘을 크게 길러 복수를 하고자 당나라 군사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게 되었다. 이에 백제의 용장 계백(階伯)은 5천의 적은 군사로써 황산(黃山)벌에서 신라 군사와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나당연합군의 수많은 군사가 일시에 수륙 양면에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해오자 왕은 그제야 성충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음을 후회하였다. 왕은 하는 수 없이 해질 때를 기다려 왕자 효(孝)를 데리고 웅진성(熊津城)으로 달아나서 싸웠으나 성문은 부서져 열리고 말았다. 수많은 궁녀들이 슬피 울면서 흉악한 적군에게 죽는 것보다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 하여 대왕포(大王浦) 물가 높은 바위 위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사비수 깊은 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이 바위를 낙화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낙화암 [落花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낙화암과 고란사
백마강과 백마강교
고란사 선착장
고란사 전경

고란사 [皐蘭寺]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扶蘇山)에 있는 고려시대 백제의 후예들이 중창한 사찰. 문화재자료.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皐蘭寺)라 하였다.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 1028년(현종 19)에 중창하였고, 1629년(인조 7)과 1797년(정조 21) 각각 중수하였으며, 1900년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단장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뿐이다. 절의 뒤뜰 커다란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촘촘히 돋아나 있고, 왕이 마셨다는 고란수의 고란샘터가 있고, 주위에는 낙화암·조룡대(釣龍臺)·사비성(泗沘城) 등이 있다. 절 일원이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고란사 [皐蘭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란사 매점 옆에 㯨古樓(율고루) 옛것을 두려워한 누각과 眞空妙有(진공묘유) 비우면 오묘함이 일어난다.
고란사 대웅전
고란사 靈鐘閣(영종각) 영혼을 울리는 종
고란사 뒷편에 고란정
고란정

소부리(부여 옛 도읍 사비)에 금실 좋은 노부부가 살았는데 자식이 없어 고민하던 중에 도사로부터 고란사의 음양 약수를 먹으라고 했다. 즉 고란사에서 음의 기운이 스며있는 고란초 잎에 맺힌 부드러운 이슬과 양의 기운이 스며있는 강한 물이 합쳐진 물을 마시라고 했다. 그러면 회춘해서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할머니는 기뻐서 반신반의하는 할아버지에게 물을 마시라고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할아버지는 돌아오시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할머니는 걱정스런 마음에 할아버지를 찾으러 갔다.

그런데 할머니는 깜짝 놀랐다. 갓난아기가 고란사 약수터 옆에 울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할아버지를 묘하게 닮아 있었다. 그제서 할머니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고란사 약수를 한번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라는 도사의 말을 할아버지에게 전하지 않은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그걸 모르고 계속 마셔셔 어린 아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할머니는 자신의 욕심을 뉘우치고 이 아이를 잘 키웠고 훗날 그 아이는 백제의 큰 재목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