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고픈 노래(가요,동요)

어린이날 노래와 유래

푸르미르(청룡) 2013. 5. 17. 17:24

 

어린이날 노래와 유래

'다시 듣고픈 노래(가요,동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린이날 노래와 유래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 민족 정신을 일깨워 주고자 1923년 소파방정환을 비롯한 일본

유학생 모임 색동회가 주동이 되어, 색동회의 창립일인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한데서 시작되었다.

1927년부터는 5월 첫째 일요일에 행사를 진행했는데, 일제의 탄압이 있던 시기인 1939년까지 중단되

었다가, 광복 이후 '어린이'를 존중하는 마음을 살리기 위해 1946년에 부활되어, 1961년에 제정·공포된

'아동복지법'에서는 매년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이후 1975년부터 공휴일지정되어 모범

어린이와 아동 복지 사업의 숨은 유공자를 발굴하여 표창하며,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여러 가지 놀이를

실시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어린이날 관광열차로 901호 증기 기관차와 같은 기차를 행하기도 하였다.

 

 
     어린이날 노래
-윤석중 작사,윤극영 작곡

날아라 새들아 푸른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우리가 자라면 나라의 일꾼
손잡고 나가자 서로 정답게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방정환(方定煥, 1899 ~1931, 서울. 아동문학가)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의 아동문화운동가이며, 
사회운동가, 아동문학가이다. 
호는 소파(小波)로 일본 유학시절 그에게 영향을 끼친 
일본의 아동 문학가인 이와야 사자나미(岩谷小波)의 
이름과 같다. 이외에도 잔물, 몽견초, 몽견인, 삼산인, 
북극성, 쌍S, 서삼득, 목성, 은파리, CWP, 길동무, 운정, 
김파영, 파영, ㅈㅎ생라는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언론검열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방경수(方慶洙)의 장남으로 태어나 1909년에 매동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이듬해 미동보통학교로 전학, 1913년에 졸업했다. 
이어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으나 1914년 중퇴했다. 
1917년 유광렬(柳光烈)·이중각(李重珏)·이복원(李馥遠) 등과 청년운동조직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해 이듬해부터 기관지 〈신청년〉을 펴냈다. 
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으며, 〈청춘〉 9월호에 수필 〈관화 觀火〉를 
발표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등사판 '독립선언문'을 인쇄해서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주일 간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1920년 일본 도요대학
[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해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이때 〈개벽〉 도쿄[東京]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그해 7월호에 시 〈갈마반도〉와 12월호에 소설 〈그날 밤〉을 발표했다.
 1921년 5월 1일 김기전(金起田)·이정호(李定浩) 등과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해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사랑하며 도와갑시다"라는 표어 아래 본격적인 소년운동을 전개했다. 
1922년에는 천도교소년회 중심으로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고, 
개벽사에서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펴냈다. 1923년 3월 20일
 순수아동잡지〈어린이〉를 창간했고, 
그해 5월 1일 도쿄에서 손진태(孫晉泰)·윤극영(尹克榮)·진장섭(秦長燮)·
고한승(高漢承) 등과 아동문화운동단체 '색동회'를 조직했다. 
색동회는 발기회록에서 "동화 및 동요를 중심으로 하고 
일반 아동문제까지 할 사"라고 밝히고 있듯이 이후 전국 각지에서 동화구연대회
·아동예술강습회·아동예술전람회·소년문제강연회 등을 열어 소년운동단체의 
통일을 꾀했고, 1925년에는 소년운동협의회 지도위원, 1927년에는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28년 조선소년연합회가 조선소년총동맹으로 개편되고 소년운동 
노선이 변화하자 일선에서 물러나〈어린이〉·〈학생〉 등의 편집에 힘썼다.
그의 아동문화운동은 어린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소년운동과 아동문학의 발전을 위한 문필활동으로 나누어진다. 

1920년대 한국 사회전반에 나타나 있던 어린이에 대한 불합리한 의식을 계몽하는 
활동을 펼치는 한편 유교적 가부장제 아래에서 희노애락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던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감성의 해방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같은 목적을 위해 그는〈어린이>등 여러 아동잡지에 
창작작품은 물론 해외 아동문학작품을 번역해서 실었다.
 
그의 번역작품은 선량·정직·노력 등 권선징악의 교훈을 바탕으로 한 
해학과 풍자를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그의 작품이 사회교화와 어린이의 사회적 
지위향상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창작동화는 비록 양적으로는 번역동화에 미치지 못하나 가난과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명랑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일제의 지배와 유교적 전통 
아래에서 고통받는 어린이에 대한 독자의 인식을 일깨워주는 노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불우한 어린이들은 불합리한 현실을 
극복해나가려는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 채 독자들의 감상에 호소함으로써 
소극적인 감상주의를 드러내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번역동화와 창작동화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어린이를 지나치게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존재로 보았는데, 
이는 1920년대 한국 아동문학의 일반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940년 5월 1일에 마해송(馬海松)·최영주(崔泳柱)가 〈소파전집〉을 펴냈고, 
1957년 '새싹회'에서 그의 아동문화운동과 아동문학의 업적을 기리는 '소파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1978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고, 1980년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윤석중(尹石重, 1911년 ~ 2003년, 서울 출생) 
한국의 아동문학가, 호는 석동(石童)이며, 양정고보를 거쳐 
1942년에 도쿄 조치 대학(上智大學) 신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24년 '신소년'에 동요〈봄>, 1925년 잡지 '어린이'에 동요
오뚜기>가 당선된 뒤 많은 동요를 발표했다.
 
1933년, 방정환의 뒤를 이어 <어린이> 주간으로 
한국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그 후 《소년중앙》·《소년》·《소학생》의 
주간을 지냈으며 조선일보 편집 고문을 지냈다.
1956년 새싹회 회장에 선출되고, 1961년 3·1 문화상 예술 부문 
본상과 1966년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70년 어린이 회관 고문이 되는 등 아동들을 위한 많은 
공헌을 하였다.
 
저서로 《윤석중 동요집》,《초생달》, 《굴렁쇠》, 
《어린이를 위한 윤석중 시집》 등이 있다.
경력 : 1995년 문학의 해 조직위원회 자문위원,  
수상 : 2003년 금관문화훈장 

윤극영(尹克榮, 1903 ~1990, 작곡가)
동요 작곡의 선구자이다. 도쿄 음악학교의 사범과 재학시절인 
1922년 방정환·조재호·진장섭·손진태·정순철·고한승·정병기와
 
함께 한국 최초의 어린이 문화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고 
동요를 작곡하면서 어린이운동을 이끌었다.
 
1923년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하고 
그해 5월 1일을 '어린이 날'로 제정했다. 

1924년 동요 〈반달〉을 작곡하고, 한국 최초의 노래단체인 
'달리아회'를 조직·지도했다.
일본 창가 말고는 부를 노래가 마땅히 없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반달>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널리 불렸던 노래였다.
 1926년 〈반달〉이라는 제목으로 동요집과 레코드 집을 펴냈다. 
동요집에는 〈반달〉·〈설날〉·〈꾀꼬리〉·〈귀뚜라미〉·〈두루미〉·
〈꼬부랑 할머니〉·〈흐르는 시내〉·
〈소금쟁이〉·〈고드름〉·〈파랑새를 찾아서〉 등 모두 10편의 동요가 실려 있다.
 
그해 북간도로 이사한 뒤에도 동요 작곡을 계속했고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400편 이상의 동요를 남겼다. 1968년 그의 업적을 기리는 노래비가 창경궁에 
세워졌고 지금은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겨져 있다.
어린이날 유래와 역사
2010년 5월 5일은 제88회 어린이날이다. 
어린이들이 자기의 생일만큼 기다리는 날이다. 우리의 어린이날은 가장 어두운 시대에, 
그러나 겨레의 희망을 품고 탄생했다. 어린이날 첫 행사가 열렸던 1923년은 우리 나라 역사상 
그 어느 때 보다 어려운 시기였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온 민족이 굶주리고 짓눌리며 
신음하던 무렵이었다. 
이런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희망은 나라의 독립이었다.하지만 그것이 아득히 멀어만 보이던 
당시에, 선각자들이 앞날의 주인공인 어린이에게서 샛별 같은 희망의 불씨를 발견했다. 
우리 어린이들을 잘 길러 그들로 하여금 나라를 되찾게 하려는 꿈을 꾼 것이다. 
1923년 5월 1일, 첫 어린이날을 알리는 선전 종이에 적힌 글귀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오늘은 어린이날, 희망의 새 명절 어린이날입니다.’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 선생을 중심으로 
진장섭ㆍ조재호ㆍ윤극영ㆍ손진태ㆍ이헌구ㆍ마해송 씨 등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색동회’가 제정했다. 
이들은 우리 동요ㆍ동시ㆍ동화ㆍ동극를 짓고, 이를 부르고 읽고 관람하게 하여,
어린이들에게 우리 얼을 심어 주려는 뜻에서 펼친 어린이 문화 운동에 앞장섰던 분들이다.
 
어린이날을 만든 것은 이런 문화 운동으로 이뤄진 하나의 결정체였다. 방정환 선생은 이보다 
앞서 3월 20일 우리 나라 최초의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했다. 
또 그때까지 어린이를 얕보는 투의 ‘아이’라는 말 대신 높임의 뜻이 담긴  어린이’로 
부르기 시작했다. 
제1회 어린이날 기념식은 천도교 소년회ㆍ반도 소년회 등을 중심으로 서울 천도교본부 
운동장에서 치러졌다. 이 날 어린이들은 어린이날 기를 앞세우고 시가 행진도 벌였다.
 
5월 5일로 어린이 날이 바뀐 것은 1927년부터였다.그러다 우리 말과 글까지 못 쓰고 할 정도로 
일제의 탄압이 발악의 지경에 이르렀던 1937년엔 어린이날도 아예 없어지고 만다. 
어린이날이 
다시 살아난 것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이다. 그 해 5월의 첫 일요일인 5일에 기념식을 열고, 
이 날을 어린이날로 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날은 윤석중 선생이 지은 ‘어린이날 노래’도 
처음 전국에 울려 퍼졌다. 
어린이날이 공휴일로 쇠게 것은 1975년부터. 소년한국일보는 어린이 단체들과 함께 이 날 
하루라도 온 가족이 어린이들과 지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1972년부터 정부에 건의한 결과,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었던 것이다.그 뒤 30 년 가까이 ‘5월 5일 어린이날’은 변함 없이 
지켜져 왔다. 

그러던 중 지난 2004년 국무회의에서 어린이날을 공휴일로 하지 않고 5월 5일이 든 주 
토요일로 옮기는 방안이 느닷없이 검토되면서 전국의 어린이들과 아동 단체로부터 큰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 검토는 끝내 없었던 일이 되고 어린이날은 현행대로 공휴일로 계속 남았다. 
하여튼 많은 뜻 있는 사람들은, 겨레의 희망을 상징하는 어린이날은 그 역사와 전통을 그대로 
살리고, 도도한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 우리의 자긍심을 살리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 출처 : 소년한국일보 

 

 

행복의 샘터  (0) 2014.07.15
한국 가요사  (0) 2014.03.26
제비꽃  (0) 2013.03.25
김동진 작곡 우리 가곡 25곡 모음  (0) 2013.03.05
동요 오빠생각 외 40곡  (0) 2013.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