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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의 이별

푸르미르(청룡) 2017. 12. 23. 17:35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하나의 口實(구실)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내가 전문 업체에 도움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요양병원에서 운명을 하시게 한 죄인의 한 사람이다.


어머님의 배속에서 10여개월 월세도 없이 살다 1947년 추운 겨울 세상 밖으로 나와 공짜로 어머님의

젖을 먹으며 6,25사변에도 어머님께서 죽을까 봐 담장 구멍 속에 숨겨가며 키워 주셨는데 그 하늘같

은혜를 입고도 불효를 하였으니 형량중에 큰 형인 무기형이 맞는다고 본다. 


어머님의 기구한 운명은 편할 날이 없으셨다.

6,25동란에 외가가 사시는 제천에 가서 피난살이를 하시며 제천역 앞에서 떡장수를 하시며 우리들을

키우시다 아버님 고향이자 조상님들이 대대로 살아온 시골로 들어 가게 된 동기가 어머님께선 늘 단

추를 잘 못 끼웠다고 생각하시며 어려운 시골 살림살이가 힘드셔서 인지 속병(담낭염)으로 고생을

시며 살으셨다.


나 역시도 가난이 싫어서 해병대를 자원입대 월남전에 참전하여 살아 돌아오면 다행이고 만에 하나

내가 전사를 한다면 전상자 가족으로 살림에 보탬은 물론 동생들은 학비를 면제받는다기에 참전을

여 청룡부대 첨병을 하였어도 살아 돌아오게 되었다. 1972년 제대를 했고 그 해 8월에 예쁜 색시

만나 결혼도 하고 직장을 들어가게 된다.


1976년 봄 어머님의 속병인 담낭염은 악화되어 아버님과 아내가 부추겨 하루에 두세 번 다닌는 곳에

버스를 기다려야 오지는 않고 3군단 군사지역이라 지나가는 군용 지프를 아내가 무조건 새웠단다.

지프가 서더니 위급한 상황을 인지하고 얼른 모시라고 하고는 고개를 넘어 부대 안으로 들어 가는데

병소 헌병들과 근무자들이 부동 자세로 소리 높여 구호와 함께 경례를하여 그때야 원스타 3군단 포

사령관님 이라는 걸 알았단다.


그리고는 장병들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헌혈을 모으고 바로 3군단 본부와 가까운 하남리에 있는 102

원으로 후송했다. 군의관이 여기에서는 수술이 힘드니 원주 기독병원으로 가라 하며 군의관의 선

게 연락을 했다고 하였다. 시골 면 소재지에는 택시도  몇 대 안될 때인데 현리에서 원주까지는

큰돈이었다. 시골 사정을 잘 아는 택시기사가 홍천서 원주 택시로 연결하여 갈 수 있게하여

비용약했다.


현리에서 굽이굽이 아흔아홉 구비길 아홉 사리(九谷嶺) 비포장길 150리를 달려 홍천에서 횡성을 거

한 비포장길 100여 리 원주에 기독병원에 도착하였으나 의료보험도 없던 시절 담낭염(膽囊炎)

술비가 70만 원이란다. 쓸개를 잘라 내야 산다고 하며 수술비 선불(先拂)을 내야 시술을 한단다. 

그럴만돈이 귀한 인지라 서민들에게는 70만원은 쉽게 구하기 힘겨웠던 시절이었다. 가난했던

우리의 사정으로는 가대(家垈)를 팔아야 될 형편에 아버님의 모습은 落心千萬(낙심천만)하여 아무

말씀도 못 하셨다.


나는 어머님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고향으로 달려가 아래마을을 다니며 70만 원을 구해

원으로 달려갔다. 주치의가 깜짝 놀라는 모습으로 수술을 서둘러 시술하여 회복이 되어 약 2

입원으로 퇴원을 하여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것이 어머님의 최초 수술이었다.


건강하시던 아버님이 간경화로 1984년에 저세상으로 떠나시고 어머님은 1986년 또다시 담석증

판정으로 간을 잘라내는 시술을 인하병원에서 하시고 회복이 잘 되어 삶의 연장이 되셨다. 그러다

2005년 또다시 담석증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개복 시술을 하면 회복이 어렵다고 하여 관을 박는 시술을 하게 되었다. 시술 주

치의에 말로는 20년 정도는 간다고 가셨는데 13년 만에 향년 91세로 저상으로 가시 되었다.

어버님 보다 30년을 더 계시다 가셨지만 가슴이 저려 온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저세상에 가셔서

아버님 만나 근심 걱정 잊으시고 오손도손 잘 지내시옵소서~~~ 


짧은 시간이지만 알뜰하게 절약하여 지도 해 주신 해병상조회 염종무  대표(해병후배)님과 직원분

께 다시 한 번 感謝드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