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참전자회 성남직할회 까치분회

청룡부대의 월남참전 배경

푸르미르(청룡) 2014. 12. 13. 22:40
청룡부대의 월남참전 배경

청룡부대의 월남참전배경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월남에 지원부대를 보낸 것은 1964년 9월에 파견한 바 있는 1개 의무중대 장병 130명과 태권도 교관단 10명이었다.월남은 1962년 고.딘.디엠 정권이 붕괴된 이래 정치적,군사적으로 혼돈상태에서 헤매고 있었으며, 그들 자체 의 힘만으로는 재건이 어려운 실정이었다.동남아에서의 월남 정책은 전세계가 주 시하는 가운데 심각한 군사문제로서 다루어지기 시작하였고, 미국의 존슨 정부는 마침내 강격책으로서 월남을 돕게 되었다.

 

 

1965년 1월 2일 월남 정부는 외무부 장관 명의로 한국의 외무부장관에게 공식서한 을 보내 자체 비 수단을 갖춘 비전투부대로서 공병대와 수송대를 요청해 왔다. 정부는 즉시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제 37회 임시국회 본회의에서 절대 다수로 가결, 2천명으로 구성된 후방건설 지원부대를 파견하게 되었다. 이 비둘기 건설 지 원부대는 육군병력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이중 해병공병 1개중대가 포함되었는데 해병대로서는 이것이 처음으로 월남에 파견된 것이다.

 

 

그후 베트콩과 월남군간의 전투는 점차 치열한 전쟁으로 확대되어갔고, 미국 또한 전쟁 속에 깊이 휘말려 들게 되자 마침내 자유우방국의 적극적인 참여를 호소해 왔다. 국군중에서도 해병대는 그 특성이 제반 지상전투 훈련은 물론이려니와 상륙작전의 광범위한 수행 능력을 갖추고 비정규전 및 대 비정규전의 특수훈련으로 국내외 어 느 곳이든지 최단시간내에 출동할 수 있는 국가전략기동부대의 성격으로 보아 국 군이 외국에 파병 될시 선봉이 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에, 해병대 사령 관은 1965년 5월 12일을 기해 해병대정책연구위원회에 명하여 파월에 필요로 하는 부대 편성연구를 지시 하였고, 6월4일에는 해병대 <작전명령 제1호>로서 파월부대 파견준비를 실질적으로 서둘렀다. 해병대정책연구위원회에서 작성한 파월부대 편성안 A,B,C안을 재삼 검토한 해병대 사령관은 제1상륙사단장에게 1개 상륙여단 편성을 골자로 한 부대 편성과 선발대 구성,파월부대 특별교육 등을 즉각 실시토록 지시, 사단에서는 이미 계획되어 실시 되던 년간 교육훈련 계획을 변경, 월남전에서 필요한 특별교육훈련을 즉각 실시하 기에 이르렀다.

 

 

1965년 6월 1일 월남 정부의 구엔카오 키 수상은 정식으로 한국정부에 전투부대 파 견을 요청했고, 정부는 동년 7월 2일 국무회의에서 국군 1개사단과 이에 따르는 지 원부대를 월남에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이 국무회의 의결에 따라 정부는 제32회 임 시국회에 국군 1개사단을 월남에 파견하는데 따른 동의를 요청, 마침내 8월 13일 국 본회의를 통과, 월남전에 파병을 결정지었다. 국방부에서는 지령 제10호로서 월남파 병에 대한 준비를 각군에 지시 하였다.

 

해병대는 이 준비지시에 의거, 1965년 8월 17일 01시를 기하여 제2연대를 기간으로 한 제1상륙사단 11연대에서 1개 포병과 공병대대에서 1개 공병소대, 근무대대에서 1개 근무중대, 의무대대에서 1개 치료및 수용중대, 본부대대에서 1개 헌병소대와 제2해병연대에 배속시킴으로서 파월"해병전투단" 편성을 마쳤다. 한편 국군 전투부 대 파월에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월남 현지의 실정을 파악고 월남군 및 미군과의 제반 협조 사항을 조사 보고하기 위해 조사단(해병대에서는 김연상장군이 파

견됨)을 현지에 파견하였다.

 

 

육군과의 병력으로 보아 해병대는 1개대대 나 연대 규모로 참가할 것이 예상되었으나 현지 실정으로는 육군과 해병대는 분리되 어 작전을 수행함이 오히려 적절하다는 보고에 의해 해병대는 준장

를 지휘관으로 하 는 여단급이 참가하게 되어 그 편성을 서둘렀다. 따라서 1965년 9월 20일, 그동안 파월 특수교육훈련을 해 온 제2해병연대를 기간으로 "제2해병여단, 청룡부대"를 편 성하게 되

었다.

 

 

이어 8월 28일 국방부로부터 파월 해병전투단은 해병대에서 준장으로 임명하라는 지 시를 받았고, 8월 30일에는 해병대사령관 및 국방부장관 추천에 의거 정부 발령으로 당시 해병대사령부 관리국장인 이봉출 준장이 해병 제2여단장에 임명되었고, 초대 참모장에는 2연대장 정태석 대령이 취임

하게 되었다. 제2해병연대는 사단의 기간연대로서 사단의 상륙작전을 비롯한 각종 지상훈련을 실 시해 오던 중 파월이 확정되자, 그간의 모든 교육훈련을 바꾸고, 출동 준비아래 특 수훈련에 돌입하게 되었다.

 

 

파월 부대원들의 특수교육을 위해 특수교육대를 편성하 기에 이르렀고, 이교육대에서는 베트콩과 월맹 정규군의 기본 전술과 각종 동굴, 지 하 진지 및 지하 벙커, 지뢰 및 부비트랩 제거와 설치법 등에 관해 주야간 없이 교 육훈련이 실시되었다. 중화력과, 전투지원부대가 거의 전무했던 해병여단에 육군 지원부대인 야전공병중대 및 155미리 포병중대 요원 297명이 8월 21일자로 배속되어 7월 3일 포항 현지 훈련장에 도착, 파월 해병부대와 함께 교육을 실시했다.

 

 

이때 영 일만 일대의 산악은 수개월간 해병여단과, 육군지원단전우들로 구성된 청룡부대의 실전을 방불케하는 포성으로 초연이 자욱했다. 9월 18일, "해병전투단"의 정식명칭이 박정희 대통령에의해 "제2해병여단 청룡부대" 로 개칭되는 동시에 여단장에 이봉출 장군이 임명되었고, 9월 20일 10시, 포항 해병 훈련기지에서는 대통령을 비롯한 삼부요인, 주한외교사절등 내외귀빈의 참석하에 "대한민국제2해병여단" 발대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제2해병여단 창설명령인 국본 일반명령 제5호가 낭독되고, 대통령으로부터 부 대기가 지휘관에게 수여되었다.

 

 

청룡부대의 모체가 된 제2연대는 1953년 8월 15일 해병도서부대를 기간으로 진해에서 창설되었다. 제2연대는 6.25동란중에는 동서 양 안에서 교동도,백령도,석도, 원산만봉쇄작전, 양도상륙작전등에서 다대한 전과를 올 렸으며 휴전으로 인해 진해로 철수 제 2연대 창설의 모체가 되었다. 제2연대는 창설이후 제1전투단 병력을 기간으로 해병여단이 편성되자 여단의 건제부 대로 편입되었고, 동년 12월에 체결된 해.공군을 증강하기 위해 한.미 군사협정에 의거 1955년 1월 1일 여단이 정식사단으로 승인되자 해병제1상륙사단의 건제부대로 서 서부전선 방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1959년 3월 28일에는 포항으로 이동하여 주한 미해군사령관 작전 지휘아래 주한 유엔군의 전략기동예비대로서 임무를 수행하였고, 1960년과 1963년의 2차에 걸쳐 해병 제1임시여단의 예하부대로서 김포반도와 강화도, 교동도를 연한 서부전선 방어를 담당했다.

 

 

그후 부대교대로 다시 포항지구로 이동하여 제1상륙사단의 주력부대로서, 국가기동 예비대로서 출전준비에 정진하던중 1965년 6월 4일 파월에 대비한 작전준비명령 제 1호에 의거 파월부대로 지정되어 3개월 간의 피땀어린 교육훈련을 마치고, 청룡부대 로 명명되어 그 결단식을 거행한 것이다. 청룡부대는 월남전 종전후 개선 귀국하여 서부전선과 수도권 방어 임무를 인수하여 1980년대 초반 "염하계획"을 거쳐 완비된 상륙사단으로 증편, 대한민국 제2해병상륙사단"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전도봉 장군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