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산행 & 여행

김영삼 대통령 기록전시관·생가

푸르미르(청룡) 2019. 7. 18. 20:00


2019년 7월 13일(토요일) 날씨 맑음
외도를 관람하고 와현항에 도착하니 오후 1시였다. 처남은 수원에 거주하지만 손주들 키우느라 거제 생활을 한지 3여 년 정도되다 보니 거제에 볼거리는 꿰뚫고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생가를 관람하고, 가덕 해저터널 운행 체험을 시켜줘서 쉽게 많은 곳을 관람하게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 기록전시관·생가

주소 :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옥포대첩로 743













생가의 역사
김영삼 전대통령은 김시흥을 시조로 하는 김녕김씨 충정공파 28세손으로 1928년 12월 20일(호적상) 경남 거제시 장목면 옥포대첩로 733-1, 대계마을에서 태어났다. 마을 앞 바닷가에 닭의 형상을 닮은 바위가 있어 큰 닭섬이란 뜻을 가진 '대계마을, 큰닭마을'이라 부르고 있으며, 13살까지 성장한 곳으로 알려진 생가는 100여년전 목조기와 형태로 지어진 건물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전면적 정비가 필요해 2000년 8월 김홍조옹으로부터 기증을 받아 거제시에서 2001년 4월 26일 개관한 곳으로 대지(566㎡)에 본채(75.23㎡), 사랑채(27㎡), 사주문(5.81㎡), 130m의 돌담으로 구성하였다.


내부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통령 재직 당시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김영삼 전대통령이 직접 글씨를 쓴 현판과 액자들이 곳곳에 걸려있다. 생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김 전 대통령의 모친인 박부연여사가 1960년 9월 25일 북한 고정간첩의 총격을 당했을 때 생긴 총알 자국이다. 이 사건으로 어머니를 잃은 김 전 대통령은 이후 강한 반공정책을 주장하게 된다. 생가 곳곳에 '민주주의' (民主主義), '대도무문' (大道無門), '호연지기'(浩然之氣) 등 김 전 대통령이 직접 쓴 글씨가 걸려 민주화를 향한 그의 열망을 새삼 일깨운다. 또한, 최근에는 생가 인근 방치된 땅에 조경수, 잔디광장,산책로 등을 조성하여 '찾고 싶은 공원'으로 변모시켰다.


아버지 김홍조(2008년 별세)와 어머니 박부연(1960년 별세)사이에서 1남5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1930년 말 어렵게 살던 시절 정치망 멸치어장과 어선 10여척을 소유했던 부잣집 외동아들로 유년시절부터 조부를 따라다니면서 대계마을의 넓은 바다를 보며 사나이다운 넓은 배포와 강직한 성품을 키우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린 김영삼이 바닷가에서 놀고 있으면 먹을거리를 가져다 주었으며 마을에 아이가 태어나면 쌀과 미역을 보내주는 도량이 넓은 여장부였다. 그러나, 1960년 9월25일 집안에 들어온 북한 고정간첩이 쏜 총에 맞아 51세 나이로 돌아가시게 되었다.


다섯살 때부터 서당을 다녔으며 외포초등학교, 통영중학교를 거쳐 경남중학교에 편입을 하였는데 책상 위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란 글을 붙여놓고 대통령이 되기 위한 꿈을 키웠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 2학년때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에서 2등으로 외무부장관상을 받았으며 1950년 2대 민의원 선거 때 장택상의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정치권과 인연을 맺었다.

1954년 3대 총선 때 고향인 거제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만25세 최연소로 국회의원이되었다. 3, 5, 6, 7, 8, 9, 10, 13,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됨으로 9선의원(7선은 부산에서당선)이라는 기록을 세우고 1974년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면서 만45세 최연소 야당총재의 기록도 보유하였다.


1992년 12월 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1993년 2월에 취임하며 대한민국 첫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을 개정하여 뿌리 깊은 선거부정을 차단하였으며 12·12 사건에 관련된 군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체시켰다. 또한, 권력의 상징이던 안가를 철거하여 청와대 앞길을 시민에게 개방하였으며, 선진국 대열에 서기 위한 국제협력단체인 OECD(1996. 10.)에 가입,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등록, 역사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중앙청건물철거(1995년)와 일제강점기 교육의 잔재이던 국민학교를초등학교로 개명(1996년)하여 자주적 교육제도를 갖추게 되었다. 그


러나 임기 말 1997년 들이닥친 경제위기와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외환위기를 맞게 되면서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변화와 개혁을 추진하며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아쉽고 미흡한 부분이 더 많았다"라고 스스로 평가를 하였다. 2015년 11월 22일 0시 22분 서울대학교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민주주의 거장은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서울대학교병원 측은 김영삼 전대통령 서거 후 기자회견에서 급성 폐혈증과 심부전증이 사인이라고 밝혔다. 그의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로 5일 국가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출처 : 거제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