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외출과 모임을 자재하다 보니 답답한 마음도 풀 겸 몇 번 가 보았던 영흥도로 아내와 함께 출발 제2경인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대부도시화방조제를 건너고 선재도를 건너 영흥도에 도착, 10시 30분인데 바닷물은 간조 되고 있었다. 바지락도 볼 겸 장경리해수욕장 주변 모래시계펜션 입구에 파킹 해 놓고 물 빠진 갯벌을 거닐다 십리포해수욕장으로 차를 돌렸다. 해수욕장 가는 길은 구불구불 2차선 어촌 길로 영흥도 선착장에서 십 리(4km)라고 십리포해변으로 유래되었다고 한다.
요즘 들어 날씨가 기온이 뚝 떨어지고 바람까지 강하게 불어 겨울이 된 기분에 바닷바람은 더 차거운 느낌이다. 간조 된 갯벌에서는 굴과 바지락 캐기 체험객들이 많이 보이고 갈매기도 함께 즐기고 있는듯하였다. 길이가 5km가 넘는 광활한 해변에 굵은 자갈과 왕모래가 섞인 해변이 4km이고 고운 모래의 해변은 1km 남짓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 해수욕장이고 나무 태그로 둘레길도 조성하여 찾는 사람들의 기대를 더하여 주는 것 같았다.
인천상륙작전전초기지 표지석을 품고 있는 천연기념물 소사나무
전혀 생각도 못 하였는데 의외로 우연찮게 역사적으로 귀중한 우리나라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 공을 세운 인천상륙작전의 전초기지가 여기라는 표지석을 보게 되어 감계가 무량하였다. 주변에는 천연기념물 소사나무가 기념비를 품고 있었다.
영흥도(靈興島)
발전의 섬으로 각광받는 곳
인천시 옹진군 영흥면에 속한 섬이다. 면적 23.46km2, 해안선 길이 42.2km이고, 섬 중앙에 최고봉인 국사봉(國思峯, 128m)이 있다. 주민은 2,551가구 5,018명, 초등학생 227명, 중학생 104명, 고등학생 123명이 있다.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23.7km 떨어져 있으며, 동쪽 1.2km 지점에는 선재도가 있다. 명칭의 유래를 보면 옛날 중국에서 오던 배가 풍랑을 만나 암초에 부딪혀 파손되어 침몰 직전에 있었는데 거북이 한 마리가 나타나 구멍을 막아 육지로 인도해주었다.
그 뒤 신령이 도와준 섬이라 하여 영흥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다른 유래를 보면 원래 명칭은 연흥도(延興島)였으나 고려 말 익령군(翼嶺君) 왕기(王奇)가 정국의 불안으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온 식구를 이끌고 이곳으로 피신하면서 익령군의 영(靈)자를 따 영흥도(靈興島)라고 칭했다고 한다.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섬 영흥도영흥도는 위치의 중요성 때문에 역사에 자주 등장한다. 영흥도 앞의 바닷길은 삼남지방에서 세곡을 싣고 오거나 중국에서 우리나라 평택으로 들어올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역이다. 또한 남해에서 서해상을 따라서 한양으로 가려면 반드시 영흥도를 거쳐 가야 한다.
오늘날도 대형 선박들이 통과하는 항로로 이용되고 있다. 영흥도 앞 바다는 삼국시대에도 중요한 뱃길이었다. 신라와 동맹을 한 당나라는 백제를 침공하기 위하여 덕적도를 거쳐 영흥도 이웃 섬 풍도에 배를 정박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영흥도 주민이 몽골군에 쫓기던 삼별초를 도와 항거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정부가 몽골에 항복하자 이에 항거한 삼별초는 강화도를 떠나 진도로 정부를 옮겨 가면서 영흥도에서 저항한 기록이 있다. 1
270년 몽골족 즉, 원나라와 항쟁하던 삼별초는 전남 진도로 진영을 옮기면서 영흥도에 70일 동안 웅거했다.<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김방경을 역적추토사로 삼아 군사 60여 명을 거느리고 몽골 송만호(宋萬戶) 등의 군사 1천여 명과 함께 삼별초를 추격하여 적선이 영흥도에 정박해 있는 것을 바라보 고방경이 치려하니 송만호가 두려워하여 말리었다.” 몽골군의 공세로 영흥도에 있던 삼별초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고 이 와중에 삼별초에 소속된 사람들 중 1천여 명이 여몽연합군에게로 투항했다고 한다.
고려가 조선으로 바뀌고 후손은 성을 전씨(全氏)나 옥씨(玉氏)로 바꾸고 숨어서 살던 시절이었다. 익령군(翼靈君)인 왕기의 목숨을 구해준 섬이라 해서 이후에 이름을 연흥도(延興島)에서 영흥도(靈興島)로 바꿨다고 한다. 익령군 후손은 목장에서 일하며 말을 키우는 목동으로 살았다고 한다. 1751년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목장에서 말을 치던 영흥도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예전의 지도에서는 영흥도 서쪽에는 또 ‘양선과거수로지영종(洋船過去水路至永宗)’이라고 적혀 있다.‘서양 배가 이 물길을 따라 영종도에 닿았다’는 뜻이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와 미국 군함들이 영흥도를 지나갔다는 기록이다. 영흥도는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거점이 된 곳이다.
인천상륙을 위하여 국군은 북한에게 점령당한 영흥도를 손에 넣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1950년 8월 20일 영흥도를 탈환했다. 상륙 지점은 영흥도의 북쪽 십리포에 있는 산돌뿌리 해변이었다. 십리포 해변에는 이 당시 희생된 이들을 위한 전비가 세웠다. 영흥도에서는 8세기 중후반에 건조된현존 최고 ‘영흥도선’이 발견되었다. 2010년 9월 영흥도 근해에서 발견된 고선박 ‘영흥도선’은 수중 발굴조사를 통해 남북국시대 선박임이 확인됐다.2013년에는 본격적인 수중 발굴조사를 통해서 고선박 1척을 인양하고, 도자기 870여 점을 건져 올렸다.
선박과 유물은 모두 8세기 중후반경 것으로 최종 분석됐다. 영흥도는 인천과 서울이 가까운 섬으로, 다른 섬과 비교하여 전략적인 위치 때문에 역사적으로 상처를 많이 입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외세의 침입 통로가 된 것이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영흥도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머리에서 기억되고 있다. 이제 서해안시대를 맞이하여 영흥도는 서해의 요충지로서 선재대교와 영흥대교의 개통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역사의 섬에서 관광의섬으로 변하고 있는데 감히 누구도 영흥도가 이렇게까지 변화되었을까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영흥도 [靈興島] - 발전의 섬으로 각광받는 곳 (한국의 섬 - 인천광역시·경기도, 2017. 3. 15., 이재언)
백령도 사곶 천연비행장 정도는 아니지만 사장이 단단합니다. 발이 전혀 빠지지 않습니다.
위 사진은 백령도 사곶 천연비행장으로 이렇게 버스가 다닐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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