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문화유적(자료모음)

청주3.1공원에서 만난 민족대표들

푸르미르(청룡) 2014. 9. 13. 17:34

 

3.1공원에서 만난 민족대표들

 

삼일공원

삼일공원이라는 이름은 3·1 운동에서 따온 것이다. 공원 안에는 충청북도 출신의 민족대표 33인인 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석구, 신홍식의 동상에 세워져 있다. 3.1공원에는 3.1 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중 이 지방 출신인 손병희, 신석구, 권병덕, 권동진, 신홍식, 정춘수 등 6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으나 1996년 2월 8일 2.8 독립선언 77돌에 맞춰 충북 사회민주단체 연대회의 측은 민족정기를 세우기 위한 목적의 일환으로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굽히지 않고 친일 활동을 한 정춘수의 동상을 철거하는데 성공하여 현재는 5인의 동상만이 모셔져 있다..

 

3.1공원은 3.1운동 61주년을 맞이하여 1980년 8월 15일에 조성되었다. 부지는 1,900평이다. 공원 구도는 태극형 모양으로 하여 역동성과 민족성을 표현하였다. 공원 이름을 ‘3.1공원’으로 한 것은 청주에서 전개된 3.1운동 자체를 기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충북 출신 6명을 선양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3.1공원에 가면, 늠름한 모습으로 높다란 좌대 위에 서서 청주 시내를 바라보고 있는 5명의 민족대표들을 만나 볼 수 있다..

 

 

 

5명의 민족대표들이 에워싸고 있는 공원의 중앙에는 독립선언서를 새긴 표석이 세워져 있다.. 모두 1,762자로 된 독립선언서에는 조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내용과 인도주의에 입각한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족자결에 의한 자주독립의 전개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선언서는 1919년

3월 28일부터 전국 각지로 전달, 배포되면서 거족적인 3·1운동의 전개에 있어 결정적인 구실을 담당하였다.. 오늘날 전해오는 국내외 각국의 독립선언과 비교해 보아도 아무 손색이 없는 명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3.1공원에 갈 때마다 시간을 내어 읽고 또 읽고 음미해 보아도 명문장이 아닐 수 없다..

 

충북 출신 민족대표 33인

 

“우리는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되는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초안을 작성하고 민족대표 33명이 서명하였다. 33명은 천도교 대표 15명, 기독교 대표 16명, 불교 대표 2명이다. 충북 출신은 모두 6명인데, 그중 5명이 청주 출신이다. 이는 전체의 15.6%로써, 전국에서 가장 많은 특정지역 출신비율이다. 이는 청주가 역사적인 인물을 많이 배출한 ‘맑고 곧은’ 고장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충북 출신 민족대표 6명은 두 계통으로 나뉘어진다. 손병희ㆍ권동진ㆍ권병덕은 동학의 정통을 잇는 천도교 대표이고, 신석구ㆍ신홍식ㆍ정춘수는 기독교(감리교) 대표이다. 이들이 충북 청주지역에서 출생 성장한 뒤 시대의 큰 흐름에 합류하여 민족대표로 활동한 데에는 지역사적 배경과 계기가 있었다.청주지역에서 많은 민족대표를 배출한 역사적 경험은 바로 동학농민혁명이었다. 손병희와 권병덕은 모두 동학농민전쟁 당시 크게 활약한 인물들이다..

 

청주지역은 1880년대에 들어와 동학이 전파되어, 동학농민전쟁기에 주요한 역할을 한 지도자급 인물들이 대거 동학에 들어왔다. 손병희와 권병덕도 마찬가지였다. 손병희는 천도교를 세운 3대 교주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1880년대 청주지역에서의 동학 확산과 동학농민혁명의 여파는 지역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전통사회와 의식체계를 붕괴시키는 힘으로 작용했다. 즉, 동학농민혁명의 여파로 지역단위의 전통사회가 급격히 해체되고, 폐쇄된 지역사회가 보다 개방화되면서, 지역민과 외부세계와의 소통도 보다 다양하고 역동적으로 이루어지었다. 그것은 청주 출신 민족대표 33인 중 감리교목사 3명의 출세과정에서 잘 증명된다. 이와 같은 지역사적 배경에서 출생ㆍ성장하여 민족지도자로 활약한 충북 출신 민족대표 6명에 관해서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여기서는 3.1공원에 모셔져 있는 왼쪽 순서대로 살펴보겠다..

 

3.1공원에서 만난 민족대표들

 

 

 

 

가덕에서 태어난 감리교목사 신홍식

3.1공원에 왼쪽 첫 번째로 서 있는 신홍식(1872∼1939)은 청주군 문의면 문산리(현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신채호ㆍ신규식과 같은 고령신씨이다. 그는 13세 때 시를 짓고 16세 때 사서삼경을 독파할 정도로 재능이 있어 과거공부에 매달렸으나, 1887년에 부친이 별세하면서 가정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데다 서출이라는 신분적인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그는 앞날을 기약할 수 없게 되면서 현실을 크게 탄식하며 방황하였다. 그는 생활 유지를 위해 장삿길에 나섰으나, 술과 무절제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그를 변화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1904년에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에 나가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그는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였고, 선교사에게 유능한 인재로 발탁되어 목회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1906년에 보은군 보은교회 권사로 목회생활을 시작하였는데, 1910년경에는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3년에 신학교를 졸업한 신홍식은 집사목사 안수를 받음과 동시에, 목사로서 본격적인 목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활동한 지역은 주로 공주, 평양, 인천, 원주지역이었다. 1919년에는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로서 서울로 올라와 ‘독립선언서’ 작성에 깊이 관여하여 1920년에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한 뒤에도 주로 인천과 원주 등지에서 목회 활동과 민족운동을 계속 하였으나, 1935년 원주읍교회 목사를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청주지역에서 활동한 일은 없었다. 다만, 1938년 2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곤욕을 치룬 뒤 청주로 낙향하였으나, 이미 그는 병마와 일제의 감시로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한 채 1939년 3월 18일에 일생을 마쳤다. 현재 그의 묘소는 고향인 가덕면 인차리에 안장되어 있다..

 

 

 

괴산 출신의 천도교 대표 권동진

3.1공원에 두 번째로 서 있는 권동진(1861~1947)은 1861년 11월 12일 괴산군 소수면 아성리에서 출생하였다. 일부에서는 경기도 포천 출신이라고도 한다. 호는 애당(愛堂) 또는 우당(憂堂)이고, 천도교 교호는 실암(實菴)이다. 본관은 안동이다. 8세 때 괴산에서 서울 인현동으로 이사하였다.

권동진은 거문도첨사로 있을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일본으로 망명하여 11년간 동경에 체류하였다. 이때 동학 교주인 손병희를 만나 함께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06년에 손병희와 함께 귀국하여 천도교의 교리를 전파하는 한편 대한협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서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청주 동학농민혁명의 맥을 이은 손병희와 권병덕

3.1공원 중앙에 위치한 손병희(1861∼1922)는 현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 출신으로, 1882년에 큰조카인 손천민의 주선으로 동학에 입도하였다. 원래 서자 출신인 손병희는 1892년 삼례․공주집회, 광화문 복합상소와 같은 동학운동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는 동학교단 소속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전봉준부대와 연합해 공주 우금치전투에 참가하였다. 여기서 살아남은 손병희는 1897년 37세 때 동학의 3대 교주가 되었다.

일본에 있던 손병희는 동학이 일진회를 중심으로 친일화하자, 1905년 12월에 동학을 천도교로 바꾼 뒤 1906년 1월에 귀국하여 일진회와의 모든 관계를 끊었다. 이렇게 동학이 천도교라는 민족종교로 거듭 태어나는 발판을 마련한 손병희는 천도교를 중심으로 종교적인 민족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그래서 천도교 지도자인 오세창 등이 추진한 독립선언서 선포계획을 적극 지원하였고 직접 서명하기까지 하였다..

 

 

3.1공원에 네 번째로 있는 권병덕(1867∼1944)은 현 청원군 미원 출신으로, 18세인 1885년에 동학에 들어왔다. 갑오년 이전에는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1894년 9월 동학농민군이 재기병하였을 때는 손병희와 함께 공주 우금치전투에 참전하였다. 그 뒤 권병덕은 이곳저곳을 방랑하다 다시 손병희를 도와 천도교를 일으키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19년 2월 25일경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 참배를 위해 상경한 권병덕은 독립선언서 계획을 듣고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한 사람 중에서 29인이 모였는데, 이때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 경찰에 자진하여 붙잡혀 2년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감사원장·선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불운했던 어린시절을 거쳐 의롭게 살다간 신석구

3.1공원에 왼쪽으로부터 다섯 번째로 있는 신석구(1875∼1950)는 신채호ㆍ신규식의 고향과 가까운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 갯골마을(介洞)에서 가난하지만 뿌리가 있는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평산신씨 사간공파의 후예로서 4대조의 무덤이 괴산, 3대조의 무덤이 진천, 할아버지의 무덤이 갯골에 있다.. 이것으로 보아 신석구 집안은 그의 할아버지 때 청주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그는 어린 시절부터 엄격한 유교의 가풍 속에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하였는데, 지혜가 총명하여 11세 때에는 향리 서당에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렇게 귀한 자료를 접하게 된 이고장 청주에서 뿌리를 내리고 계시는 채씨 문중의 멋진방랑자님의 덕분에 구경도 잘하고 등산도 잘하고

좋은 하루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