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사곡리(사지(沙池)마을)
조선 중엽 1600년경 한산 이씨(韓山李氏) 와 강능김씨(江陵金氏) 가 이 마을에 내주하여 마을 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지형이 사지앙천형(獅止仰天形) 즉 사자가 행동을 멈추고 하늘을 우럴어 보는 형국이라하여 사지 (獅止 또는 獅池ㆍ獅地) 가 되었다.
또 한 설은 이 지방 근처가 무두 사질토(沙質土) 로 모래가 많고 물이 잘 흘러나와 모래사(沙) 자와 못지(池)자를 써서 사지 라 한다. 사지 뒷산 중턱에 김 유신 장군이 수도(修道) 하였다는 장수굴이 있다.
산위에서 흘러내린 모래흙으로 많이 메몰되어져 있 는데 현재 높이는 2.7m 넓이 7m 의 굴 입구가 있다. 옆에 큰 바위벽에는 불상(佛象) 이 조각되어 높이 4m 정도가 노출되어 있고 밑부분은 토사에 묻히어 있다.
또한 사지마을 뒷산 50번지에 효자로 이름 높은 모암(慕庵) 김 덕숭(金德崇) 선생의 정려(旌閭) 가 있다. 30여호에 한산 이씨와 강능 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출처 : 진천군 지명유래
사지마을입구 버스정류장
사지마을 버스 정류장
사지마을 쉼터
앞에 보이는 사지산 우측 5부능선에 마애여래입상(중악석굴)이 있다
수령이 550년이라고 하는데 이 마을 어른이 하시는 말로는 정확한 수령은 모른다고...
김덕숭 효자문 [ 金德崇孝子門 ]
지정종목 시도기념물
지정번호 충북기념물 제134호
지정일 2005년 03월 11일
소재지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1224-5
시대 조선
종류/분류 목조건물
크기 면적 1,926㎡
2005년 3월 1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세종 때의 효자 김덕숭(金德崇 ?~1448)의 효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이다. 김덕숭은 평소 노부모를 충실히 봉양하였는데 모친이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더욱 극진히 병구환을 하였다.
꿩고기가 먹고 싶다는 모친을 위해 산신께 기도를 드렸더니 갑자기 꿩이 날아들었다 하며, 엄동설한에 잉어를 구하기 위해 얼음 위에 무릎을 꿇고 며칠을 기도하니 무릎이 닿았던 자리가 녹아 그 구멍으로 잉어 두 마리가 튀어 올랐다 한다.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놓아주고, 한 마리만 가져와 모친이 먹게 하였더니 병환이 씻은 듯이 낳았다 한다.
그의 효성에 감복하여 하늘도 도왔다는 이야기이다. 세종이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지금의 충청북도 청원군 북일면의 초정(椒井)에 거둥했을 때 그의 효행을 전해 듣고 주육(酒肉)과 백미를 하사하였으며, 사후에는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하고 삼강행실도에 그의 효행을기록하게 하였다 한다. 김덕숭효자문은 1631년(인조 11)에 세워졌으며 정면 1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출처] 김덕숭 효자문 | 두산백과
백원재
진천 사곡리 단석(鎭川 沙谷里 斷石)
화랑도는 신라(BC57-935)의 발전에 뒷받침이 될 새로운 인제를 양성하기 위한 청소년 단체로 진흥왕 때 조직이 체계화되어 유는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 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진천 출신의 흥무대왕 김유신이다.
신라의 청소년들은 신라가 팽창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화랑조직을 통하여 명산 대천을 찾아 다니며 단체생활과 공동의 의식을 수행하였다.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에 입문하여 최고의 자리인 국선에 올랐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화랑에 입문하여 수련하던 중 난승(難勝)이라는 도인을 만나 삼국통일의 비책을 받았다고 한다.
이 단석은 커다란 바위를 칼로 쳐서 잘라 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김유신이 화랑에 입문한 이후 수련하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는 장수굴(將帥窟)과 인접하여 있어 수련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곳에서 바로 오르면 옥녀봉으로 오를 수 있다
진천사곡리 마애여래입상(중악석굴)
지 정 : 지방유형문화재 제124호(1982. 12. 17)
시 대 : 삼국시대
규 모 : 전고 6.9㎝
재 료 : 석조(화강암)
위 치 : 이월면 사곡리 산 68-1 (사지마을뒤 사자산하)
이월면(梨月面) 사지마을 뒷산 중턱에 속칭 장수굴(將帥窟)이라는 큰 굴이 있으며 그 옆에 북동(北東)을 향한 바위 벽에 양각(陽刻)된 높이7m의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이 있다.
이 불상(佛像)은 선 모습으로 머리는 소발(素髮)이고 육계(肉계)가 큼직하고 양쪽 귀는 어깨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으며, 상호(相好)는 비대한 편이나 눈은 반개(半開)하였고 굳게 다문 입술에 미소가 어려 자비가 넘치고 있으며 목에는 삼도(三道: 주름)가 뚜렷하고 어깨와 가슴이 당당하며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서 가슴 아래로 U자형(字型)을 이루며 수인(手印)에 있어서는 좌수(左手)는 아래로 내려 옷깃을 내려 옷깃을 잡고 우수(右手)는 내장(內掌)하여 가슴에 대고 있다.
발 아래에는 연화좌(蓮華座)가 없으며 그 앞으로 방형(方形)의 장대석 두개로 예배석(禮拜石)을 만들어 놓았다. 이 마애여래상(磨崖如來像)은
릴리프(relief)가 강하고 당당한 어깨, 아름다운 옷의 무늬등 으로 보아 신라시대(新羅時代)의 작품으로서 현재까지 알려진 신라 마애불(新羅 磨崖佛)중 에서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애불입상(磨崖佛立像) 옆에는 커다란 굴이 있는데 이는 김유신 장군(金庾信 將軍)이 공부하를 하고 정성껏 기도를 올리어 어떤 노인을 만나 비법을 전해 받았다고 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1열전(列傳)제1에 나오는 중악(中嶽)의 석굴(石屈)로 추측된다.
중악석굴 [ 中岳石窟 ]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산68-1번지에 있는 석굴로 김유신과 얽힌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사지마을의 뒷산인 사자산 중턱에 있는 천연의 석굴로, 높이 2.7m, 넓이 7m에 이른다. 유명한 장수가 이 굴 속에서 수도를 했다 하여 장수굴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장수가 바로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 장군이고, <삼국사기>‘김유신열전’에 언급된 중악의 석굴이 바로 이 석굴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김유신은 열일곱 살 때 외적을 평정하려는 뜻을 품고 석굴에 들어가 수련하였는데 그때 어느 노인으로부터 방술의 비법을 익혔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하지만 경상북도 영천의 팔공산에도 김유신의 수련처였던 중악석굴이라 알려진 곳이 있다. 장수굴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는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24호로 지정된 높이 약 7.5m의 '진천 사곡리 마애여래입상(鎭川沙谷里磨崖如來立像)'이 조각되어 있으며, 장수굴 주변 암벽에는 고란초가 자생하고 있다.
[출처] 중악석굴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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