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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을 여행하며...

푸르미르(청룡) 2021. 8. 16. 12:53

2021년 8월 11일(수요일) 날씨 이침에 비가오다 개임

이번 여름휴가로 선배님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 수복해놓으신 화천을 알 겸 파로호를 탐방했다. 아내와 함께 파로호 전망대에서 그 치열했던 화천의 6.25를 상상하며 바라본 파라호는 은빛 물결만 반짝반짝 녹색의 산과 속삭일 뿐 매미소리만이 메아리쳐 온다. 

파로호 전망대에서 바라본 파로호 전경. 파로호는 중공군을 격파한 호수란 뜻으로, 6·25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지었다. 

 

파로호 전망대에서 

중공군에 고립됐던 해병1연대 1대대의 돌파작전

중공군의 4월 공세가 시작된 1951년 4월 22일. 국군6사단이 화천 서쪽의 사창리에서 중공군에게 무참하게 무너질 때, 인접한 화천 동쪽의 한국해병대 1연대 1대대는 중공군 대병력을 궤멸시키며 콧노래를 불렀다.

당시 상황을 보면 미 1해병사단에 배속된 한국해병대 1연대는 1대대가 선두로 나서 미 해병 5연대보다 앞서 화천을 점령했다. 그리고 생포한 중공군 포로를 심문한 결과 22일 저녁에 대규모 공세가 있으리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공정식 대대장은 전진을 멈추고 방어태세를 갖춘 뒤 야간에 중공군이 공격하자 완강히 저지하며 미군의 강력한 포병지원 사격으로 적을 격멸했다.

다음 날인 4월 23일 아침, 미 해병1사단 부사단장인 풀러 준장은 헬기를 타고 전투현장을 방문한 뒤 “한국 해병대가 정말 막강하고 대단하다”며 “중공군 전사자가 무려 2700명”이라고 확인해 줬다. 확인된 전사자가 2700명이면 사상자는 대략 5000명이고, 이는 중공군 1개 사단(1만여 명)이 한국해병대 1대대 고지 정면에 모두 투입됐음을 의미했다. 결과는 중공군 1개 사단의 궤멸이었다. 중공군의 피해 상황은 미 해병항공기가 관측해 산정한 BDA(폭격피해판정) 보고에 따라 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기념비적인 대승에도 불구하고 이때부터 해병대 1연대는 중공군에 포위돼 험로를 걸어야 했다. 특히 최선두에서 적진 깊숙이 들어갔던 1대대는 완전 고립돼 이후 엄청난 사투를 벌였다.

해병대화천지구전적비

 

해병대화천지구전적비에서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대이리에 세워진 해병대 화천지구전투전적비 적진 돌파하면서도 장비·병력 등 전투력 유지 중공군은 1951년 들어 세 차례의 주요 공세(2월, 4월, 5월)를 벌였는데, 이때 몇 가지의 공통적인 특징을 보였다. 즉 공격하기 전 정면의 적을 면밀하게 정찰해 화력이 강한 미군보다는 주로 만만한 한국군을 공격했다. 중공군의 2월 공세에서는 횡성 북방에서 국군8사단을 붕괴시켰고, 4월 공세에서는 국군6사단을 골라 궤멸시켰다. 중공군의 전술은 아군의 선두제대를 단숨에 격파한 후 후방으로 신속하게 기동해 주요 지점을 선점한 뒤 아군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중공군의 공세에 국군6사단은 사단 전체가 무너져 수십㎞ 이상 돌파됐고, 그 여파로 인접해 있던 한국해병 1연대가 속한 미1해병사단과 미24사단 등 9군단 전체가 덩달아 후퇴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가장 먼저 앞서 나갔던 한국해병 1연대 1대대의 고립은 필연이었다.

오늘날 화천군 화천읍 대이리에 세워진 해병대화천지구전투전적비는 바로 해병대 1연대 1대대의 6박7일간에 걸친 적진 포위돌파작전을 말한다. 이 작전이 높이 평가받는 것은 수차례 전투를 벌이며 적진을 돌파하면서도 장비와 병력 등 전투력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점이다. 1대대 1200명 중 비석에 새겨진 20여 명의 전사자가 피해의 전부였다. 그 결과 한 달 후에 벌어진 국군6사단의 화천저수지 전투 시 동쪽에서 공격에 가담함으로써 중공군 격멸에 일조하기도 했다.

해병대 1대대의 적진 포위돌파작전의 명암은 사실상 첫날 결정됐다. 공정식 1대대장은 도로망을 회피하고 야간에만 능선을 이용해 이동하기로 방침을 세웠고, 탄약과 식량도 철저히 준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대대 장병들은 추격해오는 중공군을 피해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며칠씩 걸으며 극심한 피곤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식량도 일찍 떨어져 배고픔과 산속의 매서운 추위 등 이중삼중의 혹독한 고통을 겪었지만 단 한 명의 낙오 없이 서로를 부축하며 나아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공군의 대병력을 피해 불가피한 소부대(중·소대급)전투 몇 차례와 아군 해병 3대대의 철수지원 작전에 힘입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판 장진호 전투’ 이렇게 볼 때 해병대 화천지구 포위돌파작전은 ‘한국판 장진호 전투’로 미1해병사단의 투혼을 능가한 작전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병대화천지구전투전적비는 현지 화천주민들은 물론이고 군 관계자 대부분도 건립 배경과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것이 오늘날 현실이지만 뒤늦게 평가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

강원도 화천으로 전사여행을 떠나보자. 그곳에서 1951년 4월의 처절했던 해병대의 투혼과 국군6사단의 파로호 승전보를 떠올리며 자유의 소중함을 되새겨보자. <국방일보 정호영기자> 해병닷컴 https://www.haebyeong.com/free/569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