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남한산성 종주

푸르미르(청룡) 2020. 2. 9. 22:41


2020년 2월 1일(토요일) 날씨 맑음

몸상태가 에전같지 않아 산성 종주는 안 한지 오랫만에 오늘은 종주를 시작합니다.

집에서 부터 남문까지 2km 성 한바퀴 종주는 약 8km 정도 되니까 한 바퀴 돌고 집에오면 약 12km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전에는 3시간 정도면 집에 왔는데 월남전 참전 덕분에 고엽제 후유증으로 건강이 안좋아 빨리 걷지를 못하는 관계로 넉넉하게 여유를 같고 홀로 걸어봅니다. 일주일에 2~ 3번만 종주를 하면  건강상태는 상위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나무에서 내 뿜는 향기가 편백나무 못지 않게 피톤치드가 나온다고 하니 一擧兩得(일거양득)이지요. 


소나무가 많은 남문(至和門)과 수어장대(守禦將臺) 서문(右翼門)을 경유 전승문(全勝門)까지만 돌아도 병원에서 문리 치료받는 것보다 좋다 생각합니다. 저는 허리통증으로 30대 후반부터 고생을 했는데 등산을하고 부터 허리가 아픈것을 모르고 30년을 살고있답니다. 물론 등산이 힘들겠지만 맑은공기에 물리치료를 받는다고 생각을하면 어떨까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기원은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672)의 옛 터를 활용하여 조선 인조 4년(1626)에 대대적으로 구축하였습니다.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으로, 둘레가 12km에 이르며 산위에 도시가 있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분지이기 때문에 백성과 함께 왕조가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保障處, 전쟁 시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곳)였습니다. 또한 남한산성은 성곽을 쌓는 축성술 면에서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계속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의 한국(조선), 일본(아즈치·모모야마시대), 중국(명나라, 청나라) 사이에 광범위한 상호 교류가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이 기간 동안 유럽의 영향을 받은 화포의 도입이 이루어졌고, 이런 무기 체계의 발달은 남한산성의 성곽 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하는데 있어서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 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바탕으로

한 등재기준(i)부터 (vi)까지 중 한 가지 이상을 충족해야 하며, 이와 더불어 완전성, 진정성, 보존 관리를 중점적으로 평가하게 됩니다. 남한산성은 OUV 기준(ii)와 기준(iv)에 부합하는 문화유산입니다. 남한산성은 총 12.4km에 달하는 성곽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남한산성의 성곽을 유심히 살펴보면 돌의 종류나 성곽을 쌓은 모습이 제각기 다릅니다. 이것은 남한산성이 어느 한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기록상 통일신라시대에 쌓았던 주장성을 기초로 하여 조금씩 증축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병자호란 등의 국제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 발달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탁월한 증거이자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성곽축성기술의 모습들을 발달단계별로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 남한산성은 다른 산성들과는 달리 산성 내에 마을과 종묘·사직을 갖추었습니다. 전쟁이나 나라에 비상이 있을 때, 임금은 한양도성에서 나와 남한산성 행궁에 머무르고, 종묘에 는 선조의 신주(神主)를 옮길 수 있는 좌전을 마련하여 조선의 임시수도로서 역할을 하였습니다. 






남한산성 내 소나무 숲은 수도권 최대의 소나무 군락으로 보존가치가 매우 높다. 보기 드문 이 아름다운 소나무 숲은 일제 강점기에 전쟁 물자로 확보하고 땔감으로 무분별한 벌목이 이루어져 산성리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금림조합을 결성하여 소나무 숲을 가꾸고 보전하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남한산성에서는 항일운동의 근거지 중 하나로 성벽이며, 행궁이 심하게 훼손되고 남한산 초등학교 교사가 전소가 돼 전쟁의 상처가 깊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5월 10일 남한산성은 한국에서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행궁 터에 남한산성과 관련된 문화유산과 물산을 전시하는 경기도 물산 진열관이 지어졌다.

南門(남문)





1960년대 후반들어 경기도는 남한산성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는데 필요한 남한산성 기초조사 실시와 도립공원 조성 기본 계획을 수립하였다. 먼저 남한산성 관광객 및 교통 실태에 대한 기초조사가 이뤄졌으며 이는 1969년에 발간된 「남한산성 도립공원후보지 기본조사계획보고서」에 수록되었다. 또한 위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산성리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데, 산성리에는 100여 호가 거주하였고, 공공시설로는 중부면 사무소, 남한산 초등학교, 경찰지서, 우체국, 여관이 2개, 의원과 약국이 각 1개가 있었다. 마을의 민가는 대체로 초가와 목조 건물이었고, 공공건물과 여관만 기와와 양옥집이었다. 교통로는 우남로와 함께 동문에서 산성천을 따라 광지원으로 연결되는 7.8km 폭 5m 내외의 자연 도로가 있었다. 당시 관광객 수는 1년에 15만 명 정도로 대부분 당일 관광객이었다.



1971년 3월 17일 남한산성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남한산성의 체계적인 관리가 시작되었다. 도로개선을 위해 1974년 광지원에서 남한산성을 통과하여 성남으로 이어지는 308번(342번) 지방도의 도로 포장을 진행하였으며, 문화재 보수 복원 작업 또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같은 해에 중부면 사무소가 산성리에서 광지원리로 이전하였다. 남한산성 문화재를 보호하고 공원의 시설물을 유지, 관리하기 위해 1976년 남한산성관리사무소를 개소하였다.



장경사


1980년대 중반 이후 자가용 시대가 열리면서 남한산성 안의 산성리 마을은 서울 인근의 관광 휴양지로 바뀌었다. 주민과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남한산성 내에 새마을금고를 비롯 산성보건진료소, 중부농업협동조합 산성리 분소가 영업을 시작하였다. 1999년 1월부터 남한산성 하수처리장이 가동되어 오폐수에 대한 처리 능력이 향상되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지방자치단체, 지역문화단체 등을 중심으로 남한산성을 재조명하는 작업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 예로,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이 1996년 4월부터 결성되어 현재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또한 1997년 경기도의회 내에 남한산성보존협의회가 결성되었으며, 1998년 경기도에 의해 남한산성에 대한 종합적인 복원 계획이 수립되었다.



한편, 주민들이 주도하여 1999년부터 ‘산성리 마을 신문’을 발간하여 왔는데, 이는 일제시대 금림조합의 결성으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소나무 숲을 가꾸고 보전하였듯이 주민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마을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남한산성 도립공원은 「자연공원법」에 의거 자연공원 내 자연자원을 10년마다 조사하고 있으며, 자연생태계 조사자료 및 공원관리실태 자료의 DB 구축으로 생태계보전의 지속적인 분석과 학술연구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남한산성 도립공원 및 남한산성내 야생 동·식물을 보호, 관리하고 자연자원에 대한 효율적인 관리방안과 보호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정기적인 모니터링이 실시되고 있다.

출처 :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