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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넘나드는 전선에서 번 그 돈은 다 어디로 갔나?

푸르미르(청룡) 2015. 8. 14. 18:01

죽음 넘나드는 전선에서 번 그 돈은 다 어디로 갔나?

 

 죽음 넘나드는 전선에서 번 그 돈은 다 어디로 갔나? 

                                                                                서울 국제대학교 교수 박태균 

 

 

1971년 9월15일 ‘한진파월기술자 미지불임금 청산 투쟁위원회’ 40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서울 남대문로2가 칼빌딩에 몰려들어 미지급 임금 149억원을 달라고 외치며

호텔 유리와 로비 기물을 부수고 국제선 매표실에 불을 질렀다.

칼빌딩 농성자 중 13명에겐 징역 1~5년이 선고되었다.

한진 쪽이 미불임금으로 어떤 제재를 받았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사진 1972년 보도사진연감

 

 

 

▶박태균 서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20세기 또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격주로 풀어낸다.

  

1960년대의 성공적인 제1, 2차 경제개발계획의 실행 과정을 통해 박정희는 두 번에 걸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9년에는 3선을 위한 개헌에 성공했다. 재야와 시민, 그리고 학생들의 반대로 인해 3선 개헌 과정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베트남 전쟁 특수를 통해 경제성장에 성공한 박정희로서는 그의 업적을 마지막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상황에 와 있었다. 물론 풀어야 할 난제도 많았다. 

  

베트남 파병 이후 더욱 악화된 남북관계를 푸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고, 베트남에 파병된 군인들과 돈을 벌기 위해 간 근로자와 민간인들을 무사히 귀국시켜야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과제였다. 그뿐만 아니라 닉슨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더 이상 한국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대미 무역 문제도 풀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박정희 정부한테 1970년대는 장밋빛 연대가 될 수 없었다. 1960년대를 지나고 새로운 10년인 1970년대를 맞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는 어땠을까?

  

 

‘용병’이라 하기에 너무 적은 전투수당

  

“올해는 돈 없고 빽 없는 모든 동포들에게도 마음 놓고 명랑하게 살 수 있는 한 해가 되어 주었으면 싶다. 지서 앞을 지날 때 까닭없이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젊은 면서기의 반말 섞인 핀잔을 듣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어 주었으면 싶다. 기름을 주지 않아도 절로 민원서류가 돌고 서민들의 눈에 두려움과 비굴이 가시는 세상이 되어 주었으면 한다. (중략) 

  

60년대는 민권의 함성으로 막이 열렸다. 70년대는 건설의 함성 속에 막이 열리고 있다. 그러나 함성의 요란함 속에서도 가냘프게 들리는 응달의 서민 소리를 그냥 씻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동아일보> 1970년 1월1일치 횡설수설)

  

4·19 혁명과 5·16 쿠데타로부터 10년, 베트남 파병의 전쟁 특수로부터 5년이 지난 1970년의 시점에서 서민들의 삶은 아직도 고된 것이었다. 서민의 아들들이 베트남에서 열심히 돈을 벌어 왔지만, 이들은 아직도 빡빡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파병 군인들은 수당의 대부분을 가족들에게 송금했다. 이들이 현지에서 쓴 금액은 수당 중 20%도 되지 않는 4000만달러 정도였다. 죽음을 넘나드는 베트남 전선에서 군인들은 좋은 아들, 좋은 남편, 좋은 아빠였다. 총 파병 군인 수를 32만명으로 계산하면 1인당 100달러가 조금 넘는 돈을 1년의 주둔 기간 동안 사용했을 뿐이다. 

  

그만큼 현지에서 돈을 쓸 여유가 없었다. 베트남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군은 휴양지에서 콜라도 사먹지 않고 하루 종일 수영만 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돈을 쓸 수 없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들의 전투수당이나 월급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이들에게 지급된 전투 수당은 매월 장군이 210~300달러, 영관급이 165~191달러, 그리고 위관급이 135~150달러였던 데 비해, 가장 많은 수가 파견되어 전선에서 직접 전투를 수행한 하사관(57~125달러: 1만4820원~3만2500원)과 사병(37.5~54달러: 9750~1만4040원)의 수당은 위관급의 2분의 1에서 3분의 1 정도였다. 상사쯤 되어야 국내 회사원보다 더 높은 월급을 받았다. 

  

전투수당 외에 월급은 준장이 177달러(4만5120원), 대령이 115달러(2만9440원)였던 데 반해, 중위가 36달러(9080원), 하사가 14달러(3490원), 병장이 1.6달러(400원), 그리고 이병은 1달러(260원)였다.

  

 

 

 

그나마 베트남의 한국군이 받는 전투수당은 남베트남군이 미군으로부터 지원받는 전투수당보다도 적었다. 한국의 장군들은 더 많이 받았지만, 사병들은 더 적게 받았다. 미군과 비교하면 4분의 1 수준도 되지 않았으며, 필리핀군이나 타이군(태국군)과 비교해서도 낮은 수준이었다. 당시 필리핀이나 타이보다도 낮은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과 물가를 기준으로 더 낮게 책정되었을 수도 있지만, 미군과 동일한 수준의 대우를 하겠다던 미국 정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70년 미국 의회의 사이밍턴위원회에서 브라운각서 체결 시 공개하지 않았던 한국군에 대한 전투수당 및 전사상자 보상금 조항이 공개되었을 때 한국군이 미국의 용병이라는 논란이 제기되었지만, 용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적은 액수였다. 

  

파병 군인들이 이 정도의 전투수당과 월급을 받고서도 만약 베트남에서 돈을 썼다면 본국에 송금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 수 없었다. 파병 군인과 기술자들의 저축액이 당시 한국의 가계저축액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967년 76.4%를 정점으로 해서 1969년 51.8%, 1970년 45.5%에 이르렀다. 죽거나 부상을 당해도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사상자는 미국 정부가 지급하는 재해보상금을 받았는데, 전사자의 경우 총 4968명에게 29억9200만원 정도가 지급되었다. 이는 1인당 평균 60만2300원(2316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부상으로 장애를 입은 경우에는 8004명에게 총 35억1300여만원이 지급되었다. 부상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부상자의 수로 나누어 보면, 1인당 평균 44만원(1690달러)이 지급되었다. 이는 전사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높은 액수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3년 정도의 소득에 지나지 않는 액수였다.

  

1966년의 기록을 보면 장군과 영관급의 경우 전사 및 장애 1급은 72만5760원을 받은 반면, 위관급은 51만원에서 65만원, 중사 이상의 하사관은 36만원에서 62만원을 받았다. 하사 이하 사병들에게는 34만3200원(1320달러)이 지급되었으며, 순직 및 장애도 2급에게는 22만8800원, 사망 및 장애도 3급에게는 17만1600원(650달러)이 지급되었다. 사병들이 전사했을 때 받는 금액은 당시 직장인의 1년치 월급을 조금 웃도는 액수였다.

  

죽음 넘나드는 베트남 전선에서 군인들은 좋은 아들· 남편· 아빠 1년간 1인당 100달러쯤 썼을 뿐 베트남인들 눈에 비친 한국군은 콜라도 안 사먹고 종일 수영만 파병군인과 기술자들 월급으로 국내저축 큰 폭 증가했음에도 1969년부터 부실기업 속출하고 1972년엔 8·3조치 긴급명령 -죽음 무릅쓰고 번 돈 다 어디로-.....

  

 

 

  

대위·하사·병장이 가장 많이 죽어

  

전사자를 보면 위관급 중에는 대위(110명, 장교 사망자 중 약 35%)가 가장 많았고, 하사관 중에는 하사(1289명, 하사관 사망자 중 70%), 사병 중에는 병장(1433명, 전체 사병 중 48%)이 많았다. 대위와 하사, 그리고 병장들은 하나의 전투 단위를 이루어 전선의 제일 앞에서 싸운 군인들이었다. 또한 전체 전사자 중 위관급 이상이 297명(15.6%), 하사관급 이하가 4327명(84.4%)이었다. 전사상자 보상금이 정확히 다 지급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기술자, 근로자들도 생사를 넘나들었다. 한진의 경우 꾸이년(퀴논)에서 하역된 물품들을 안케패스를 따라서 쁠래이꾸로 수송하는 작업을 했는데, 이곳은 베트남 중부에서 가장 많은 전투가 있던 지역 중 하나였다. 따라서 희생자가 날 수밖에 없었다. 1966년 베트남에 진출해서 1969년 초까지 16명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1969년 8명 중경상, 1970년 4명 사망, 7명 부상, 1971년 5명 사망, 11명 부상 등 사상자가 끊이지 않았다. 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보상금이 지급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기술자들 봉급도 제때 지급되지 못했다. 1971년 9월15일에 발생한 칼빌딩 방화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당시 기술자들에 의하면 1966년 이래 파월 기술자 4000명에게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법정 제 수당이 지급되지 않았다. 1인당 375만원, 도합 149억원에 달하는 임금도 지급되지 않았다. 비정규직으로서 노동쟁의를 비롯한 단체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불리한 노동계약을 한 한진의 근로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항의할 수 없었다. 이들은 한국 기업이 미국 기업의 하청을 받을 때는 1인당 계약액이 1000달러 이상이었는데, 지급된 것은 포괄수당으로 400여달러 정도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기술자, 근로자들은 1969년 9월 ‘귀국파월기술자친목회’를 조직하여, 미불임금을 받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민사소송을 하다가 1971년 2월 ‘한진파월기술자 미지불임금 청산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동년 9월15일 칼빌딩에 들어가 빌딩을 점거하고 회사에 미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다가, 회사 쪽이 이를 수용하지 않자 방화를 하게 되었다. 

  

칼빌딩 농성자 중 13명에게 징역 1~5년이 선고되었다. 한진 쪽은 미불임금으로 어떤 제재를 받았는지 알려지지 않았다.(이상 윤충로, “베트남전쟁 시기 ‘월남재벌’의 형성과 파월기술자의 저항”)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허상이었나? ‘굳게 닫힌 그 입술 무거운 그 철모 웃으며 돌아왔네.’ ‘폼을 내는 김상사’와 ‘믿음직한 김상사’는 ‘내 맘에 들었어요’. 베트남에 다녀오면 돈뿐만 아니라 귀국할 때 미제 전자제품과 양담배 등을 많이 가져온다고 소문이 났던 것 같다. 

  

또 그런 소문과 노래를 통해서 베트남으로 가라는 주문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전선에서 겪어야 했던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은 누구도 노래로 만들지 못했다. 노래를 불렀던 당대의 아이돌 김추자씨는 1969년 ‘님은 먼 곳에’를 드라마 주제곡으로 발표했는데, 실상 그 가사는 먼 전장에서 죽어간 군인들을 그리는 듯했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 산다 할 것을/ … 

님은 먼 곳에 영원히 먼 곳에…’

  

정글에서 수색작업을 하면서 미군 비행기가 고엽제를 뿌리면 하늘에서 물이 떨어져서 시원하다고 느끼면서 기꺼이 고엽제를 맞았던 군인들. 베트콩과 민간인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민간인을 죽인 뒤 겪게 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베트콩으로 잘못 알고 아군에게 총기 사고를 일으킨 군인들의 정신적 고통. 베트남의 후방에서 근무했던 군인들과는 달리 전선에 있었던 군인들이 가져온 돈은 모든 고통의 대가였다.

  

정부는 이들에게 충분한 대가를 치렀는가? 한국 정부가 미국 의회의 사이밍턴위원회 청문회 자료로 제출한 자료를 보면 1969년 11월30일까지 미국으로부터 한국군 근무수당 1억2700만달러, 전사상자 보상금으로 1040만달러가 지급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당시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합의한 수당을 고려한다면, 정부가 수당의 대부분을 제대로 지급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실제로 각각의 병사들에게 어느 정도가 지급되었는가에 대해서 밝힌 자료는 없다.

  

사이밍턴위원회 당시 한국 정부는 브라운각서 이후 한국에 공여된 미국의 원조 관련 자료들을 보내면서, 미국 정부에 대해 각서 중 민감한 부분(군원이관과 ‘주월한국군 장병에 대한 수당 및 전사시에 대한 보상 문제’)에 대해서는 삭제하거나 적절히 표현을 바꾸어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이 문서는 “브라운각서 공개 문제와 관련한 정부의 조치 사항 및 경위”(1970년 2월)라는 제하에 작성되었으며, 문서의 겉표지에는 ‘예고문’이라는 이름으로 “폐기하라(1970.3.5.)”는 내용이 적혀 있다.

  

 

 

 

전쟁터서 번 돈으로 경제성장, 자랑할 일인가!!

  

현재까지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군인들이 받은 전투수당은 1966년 3월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합의한 일당(하사 1.9달러, 병장 1.8달러, 상병 1.5달러, 일병 1.35달러, 이병 1.25달러)과 지급한 일당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 그 금액이 그대로 지급되었다고 하더라도 병사들이 받은 수당의 대부분을 ‘강제’로 송금하도록 했을 가능성이 있다. 

  

송금수수료, 환전수수료만으로도 한국 정부는 큰 수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베트남에 파병된 다른 나라의 군인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적은 보상을 받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귀국 후 국가유공자로 적절한 보상을 못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엽제 피해를 입은 군인들에 대한 치료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및 뉴질랜드의 참전 군인들의 경우 1984년 고엽제 제조회사로부터 1억8000만달러의 기금을 지급받았지만, 한국군의 경우는 그 대상이 되지 못했다. 

  

1993년 한국 정부는 법률 제4547호로 고엽제 후유증환자 지원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지만,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를 제대로 판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보상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베트남 참전자들의 사이트에는 “고엽제 환자 전면 재신검해야 합니다. 엉터리 고엽제 때문에 실질적으로 혜택을 받아야 할 전우들이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라는 언급도 있다.

  

개인들에게는 충분히 보상을 하지 못했어도 국가적 차원에서 볼 때 전쟁 특수가 경제성장에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주장에도 함정이 있다. 베트남 파병 군인들과 기술자들의 월급으로 국내 저축이 큰 폭으로 증가했음에도, 1969년부터 부실기업이 속출하고, 1972년에 가서는 급기야 8·3 조치라는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효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부실기업 사태와 8·3 조치가 기업가들의 부도덕한 운영(주로 부동산 투기와 위장사채의 운용)과 정부의 과도한 수출 추진 정책이 빚어낸 결과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위기를 막아내기에 충분한 국내 저축은 존재하지 않았던가? 군인과 기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가서, 그것도 한푼 한푼 아껴서 보낸 돈은 다 어디로 갔던 것인가?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 한국의 젊은이들, 그리고 그 나라 민간인들의 피를 보면서 번 돈이 과연 얼마나 떳떳한 돈이 될까? 미래의 세대들이 베트남 전쟁터에서 벌어온 돈으로 한국이 이렇게 발전했다고 한다면 자랑스러워할까? 일본이 한국전쟁 시기 전쟁특수를 통해 경제부흥을 이룩했다는 데 대해서는 온갖 비판을 다 하면서, 우리가 한 것에 대해서는 잘했다고 할 수 있는가?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인가?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출처 : 월남전 참전자 중앙회 IT위원 카페에서 모셔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