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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정암조광조선생적려유허비(和順靜菴趙光朝先生謫廬遺墟碑)

푸르미르(청룡) 2015. 9. 19. 23:11

화순정암조광조선생적려유허비(和順靜菴趙光朝先生謫廬遺墟碑)


화순정암조광조선생적려유허비(和順靜菴趙光朝先生謫廬遺墟碑)

시도기념물 제41호(전남)

 
탐방일자 : 2015년 9월 18일 금요일 밁음

소 재 지 : 전남 화순군 능주면 정암길 30 

 

정암 선생(1482 성종 13 - 1519 중종 14)의 휘는 광조요 자는 효직(孝直)이며 한양 조씨의 문중에서 태어났다. 한성 출생이며 개국 공신 온(溫)의 5대 손으로 감찰 원강(元鋼)의 아들이다. 조광조(1482∼1519) 선생의 호는 정암으로, 중종 10년(1515)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예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중종 14년(1519)에는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기묘사화를 당해 이곳 능주 지방으로 유배되었으며, 그해 12월 20일에 사약을 받았다. 그는 기성세력을 축출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 선조 대에 와서야 영의정에 추증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훗날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하여 곳곳에 사당이 마련되고 서원도 설립되었다.

 

적려(謫廬)란 귀양 또는 유배되어 갔던 곳을 이르며, 유허비는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히어 후세에 알리고자 세워두는 비를 말하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종 때 이곳에 유배당한 조광조 선생의 옛 자취를 기록해 두고 있다.

 

 

꿀물로 走 肖 爲 王 이라고 써서 벌래가 먹게하여 임금께 趙씨가 왕을 꿈꾸고 있다고...

 

입구부터 목사 고을 능주문이란 현판이 근엄하게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 관광안내판이 있어서 찾기기 쉬습니다.


도착하여 들어 가기전 문화 해설 요원으로부터 유인물과 서명을 부탁한다.

 

요즘은 도로가 잘 돼 있어서 서울에서도 자가용으로 3시간 30분 이면 갈 수 있어서 당일로도 충분히 다녀 올 수 있는 거리이다. 참배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해설사 분이 점심식사 할 곳도 알려줘서 청국장 백반이 냄새도 없고 맛있게 먹었다.

 

 

비는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은 자연석에 가까운 암석으로 거북의 형태이다. 비몸에는 앞면에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라는 글씨를 2줄의 해서체로 새겼으며, 뒷면에는 선생의 유배내력을 적었다. 머릿돌은 반달 모양으로 앞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엉키어 있고 뒷면에는 구름을 타고 오르는 용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비를 제작한 시기는 현종 8년(1667) 4월로, 당시 능주목사를 지내던 민여노가 건립하였으며,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그 소리에 놀란 금부도사는 군졸들로 하여금 사약 한 사발을 다시 가져오게 하였고, 조광조는 단숨에 그것을 비우고 피를 쏟으며 절명하였다고 한다. 그 소리에 놀란 금부도사는 군졸들로 하여금 사약 한 사발을 다시 가져오게 하였고, 조광조는 단숨에 그것을 비우고 피를 쏟으며 절명하였다고 한다.


 

 

조광조는 유배생활 한 달 만에 그는 중종이 내리는 사약을 들고 온 금부도사와 마주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사약을 받아야 할 운명이라는 걸 알게 된 조광조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새 옷을 갈아입고, 제자 장잠(張潛)으로 하여금 지필묵을 준비하라 일렀다. 곧 그의 손끝에서는 위와 같은 '절명시'가 붓을 타고 흘러 나왔다. 조광조는 이 시를 쓰고 나서 주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내가 죽거든 관으로 쓸 나무는 얇은 것으로 하라. 두껍고 무거운 송판을 쓰면 먼 길 가기 어렵기 때문이니라." 그러고 나서 조광조는 곧바로 마당으로 나가 땅에 무릎을 꿇고 사약을 받았다. 때는 12월이어서 겨울 해가 짧았고, 석양으로 기운 해가 붉은 기운을 마당 한 가운데 피처럼 토해내고 있었다.

 

 

 

절명시(絶命詩)

愛君如愛父 (애군여애부)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였고,
憂國如憂家 (애국여애가) 나라 근심하기를 집안 근심하듯 하였노라.

白日臨下土 (자애임하토) 밝은 해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昭昭照丹衷 (소소조단충) 거짓 없는 이내 정성을 환하게 비추리라.

 

영정각(影幀閣)▼

영정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로 1986년에 건립되었으며 정안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정암 조광조 영정▼

250여연전, 국오(菊塢) 정홍래(鄭弘來, 1720 ~ 미상) 화백 작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本貫이 漢陽인 趙氏들은 祭酒와 과일을 준비하여 향도 피우고 拜禮를 해야 되지 않나 생각 한다.

 

 

정암 조광조선생 적려유허지에 1986년에 세워진 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이다. 강단 마루 벽에는 "절명시" 등 정암 선생의 글이 많이 걸려있다.   

愛憂堂(애우당)이란 정암선생의 絶命詩(절명시)를 뜻하는 글입니다.

▼愛憂堂 편액
후학(後學) 이병현(李炳玹)의 글씨


역사 기록에 의하면 그가 사약 한 사발을 마시고도 죽지 않자, 금부도사는 군졸들로 하여금 목을 졸라 죽이라고 명했다고 한다. 바로 그때 조광조는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잠깐 멈춰라! 성상께서 나의 목이나마 보존케 하려고 사약을 내리신 것인데, 너희들이 어찌 함부로 내 몸에 손을 대려 하느냐? 어서 사약 한 사발을 더 가져오너라!”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

誰憐身似傷弓鳥(유린신사상궁도)  ▶누가 화살 맞아 상처 난 새의 신세 가련히 여길까

自笑心同失馬翁(자소심동시미옹)  ▶말 잃고 허전한 늙은이 같은 마음 스스로 웃노라

猿鶴正嗔吾不返(원학정진오불반)  ▶원학은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성화를 해대지만

豈知難出伏盆中(기지난출복분중)  ▶복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謫中居家(적중거가)

귀양 중에 살았던 초가로 가운데 기둥 상단에 "謫中居家"라는 조그만 현판이 붙어 있다.정암 조광조가 유배생활을 할 때 기거하던 처소로 방 두 칸, 부엌 한 칸의 세 칸짜리 초가집으로 유배 당시의 누옥을 재현하여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謫中居家(적중거가) 정암선생께서 유배중에 사시던 곳입니디.


민유중의 전서(篆書) ▼

정암선생에게 묻노니 청현 서태일 선생께서 지초(芝草)나 난초의 향기와 같고 기상은 비 개인 후인 가을 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막 걷힌 뒤의 밝은 달이여서 인욕(人慾)을 초월한 사람이라 한들 38세에 사약은 무슨 뜻이 있는 것이며 학문이 포은(圃隱)과 한훤당(寒暄堂)을 앞서고 왕도정치를 외쳤어도 정작 백성에겐 무엇을 하였소?

 

 

 

追慕碑閣(추모비각)이라는 작은 현판

 

정암 조선생 적려유허추모비(靜菴 趙先生 謫廬遺墟追募碑) 비각(碑閣) 전남기념물 제41호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이다. 창방과 평방을 두르고 우물천장을 하였으며 방풍판을 달았다. 1982년, 1983년, 1997년에 보수하였다.

총높이 295cm이며, 귀부의 높이 164cm, 귀부 너비 81cm, 귀부의 두께 29cm, 이수의 높이는 71cm. 1667년(현종 8) 능주목사 민여로(閔汝老)가 건립했다. 전면에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라고 해서체 종서 2행, 비신 뒷면 상단에 '정암조선생추모비'라 전액하고 밑으로는 정암의 유배 내력을 기록하였고,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민유중이 전서(篆書)하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사서삼경의 절학(絶學)은 한 점 뜬 구름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목숨을 터럭만큼이라도 더 지켜주지 못하였음에 한낱 바닥을 흐르는 물보다 유연치 못하외다성급한 성정은 고기한 점으로 스승을 책하던 것과 무엇이 다르며 내편을 만드는 현량(賢良)들은 훈구(勳舊)의 무리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요?

 

선생 이후 사림의 뿌리가 살아 남아 번창하였으나 무엇 하나 백성을 위한 씨앗을 심어 주지 못했고 그 흔적이 오늘에 이르러 편벽한 고집불통이 되어 어설프고 어설픈 학문으로 변신하여 구호와 명분만 내세우고 실리와 행위가 없으니 오직 허명(虛名)뿐인가 하는데 선생의 생각은 어떠하오?

 

[출처 : 검색 조합 인용]

 

 

 

 

 


화장실도 깔끔하게 단장 해 놓았어요.

 

청국장 백반이 일품인 밫고을 회관식당 앞에 널직한 주차장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