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문화유적(자료모음)

포은정몽주선생묘 [圃隱鄭夢周先生墓]

푸르미르(청룡) 2015. 9. 8. 21:35

 

포은정몽주선생묘 [圃隱鄭夢周先生墓]

 

포은정몽주선생묘 [圃隱鄭夢周先生墓]

 

 

 

 

 

 

 

 

포은정몽주선생묘 [圃隱鄭夢周先生墓]

 

지정번호 경기기념물 제1호

지정일 1972년 05월 04일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능곡로 45(모현면 능원리 산 3)

 

1972년 5월 4일 경기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재화가 관리한다. 정몽주가 고려 왕실을 지키려 하다가 개성 선죽교에서 타살된 뒤 1406년(태종 6) 3월, 풍덕군(豊德郡)에 추장하였던 묘소를 지금의 자리에 옮겨 부인 경주이씨와 합장하였다. 묘소는 단분(單墳)으로 상석, 혼유석, 망주석, 문인석 등이 종전부터 있었으며 곡담과 둘레돌 등은 1970년에 추가 설치한 것이다. 1980년에는 묘역의 민가 3채를 이전하고 신도비각, 재실(齋室) 등 대대적으로 정화 사업을 실시하였다.

 

묘역에는 묘표와 신도비가 있다. 묘표는 1517년(중종 12)에 태학들이 정몽주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중종에게 청원하여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에 세웠는데 앞면에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신도비는 1699년(숙종 25)에 세웠는데 현종 때의 문신 김수증(金壽增)이 비문을 썼고, 글은 송시열(宋時烈)이 지었으며, 전액은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그가 순절한 뒤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후에 고향 경상북도 영천으로 천묘(遷墓)했는데 면례행렬이 지금의 용인시 수지읍 경계에 이르렀을 때 앞에 세웠던 명정(銘旌)이 바람에 날려 현재 위치에 떨어져 이곳에 안치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몽주선생묘 [鄭夢周先生墓] (두산백과)

 

 

포은선생 묘소에 얽힌 유래 [圃隱先生 墓所에 얽힌 由來]

 

용인시 모현면의 능원리에는 포은 정몽주선생 묘가 있다. 묘 앞에는 선생의 제사를 받들고 있는 재실이 있고, 멀리서 마주보고 있는 곳에는 충렬서원이 있다. 그리고 정몽주 선생 묘 바로 옆에는 저헌 이석형(李石亨)의 묘가 있는데, 「포은선생 묘소에 얽힌 유래」는 이 두 묘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이유를 말해 주는 이야기이다.

 

포은 선생이 개성의 선죽교에서 타살된 뒤 임시로 개성의 한 지역에 모셔졌다가 고향인 영천으로 이장하기 위해 길을 나설 때의 일이다. 개성에서 상여를 메고 영천을 향해 가던 중 지금의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더니, 바람결에 포은 선생이 명정이 벗겨져 날아가 버렸다.

 

때아닌 바람에 명정이 벗겨져 길이라도 인도하듯 날아가자, 지관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이를 신기하게 여겨 명정이 날아가는 곳을 끝까지 따라가 보니 지금의 저헌 선생이 모셔진 곳에 떨어져 있었다. 사방을 두루 살펴보던 지관은, 세상에 이곳보다 더 훌륭한 명당자리는 없을 것이라고 감탄하면서, 포은 선생의 후손들에게 이는 선생께서 스스로 마련하신 명당자리이니 마땅히 이곳에 안장하여야 할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이때 포은 선생의 증손녀인 저헌 선생의 부인도 이 이야기를 들었다. 순간, 저헌 선생의 부인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을 얻어서 자신의 남편과 자신의 안장지로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묏자리를 발견한 시간이 저녁 무렵이었기 때문에, 포은 선생의 후손들은 종자들을 다그쳐 이날 겨우 광만 마련하고 상여는 다음 날 안장하기로 하였다.

 

이 틈을 노린 저헌 선생의 부인은 남몰래 밤새도록 물을 길어다 사람들이 파놓은 광에 부었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이 일을 계속하기 위해 나와 보니 광 속에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지관과 후손들은 크게 당황하였으나, 바로 그 옆자리도 역시 명당자리이니 여기다 모시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며 중론을 모은 끝에 나중에 정한 택지에 모시기로 하였다.

 

그후 저헌 선생의 부인은 남편이 죽자 맨 처음 명정이 떨어진 곳에다 묘지를 마련하라고 지시하였다. 저헌 선생은 바로 포은 선생의 증손주 사위였기에 아무도 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윽고 저헌 선생의 부인은 노환으로 자리에 눕자 아들들을 불러서는, “내가 죽거든 너희 아버지가 묻힌 곳에 합장하거라.

 

그러면 우리 연안이씨 집안에는 대대로 복록이 끊기지 않을 것이다.” 하고 일러 주었다. 저헌 선생의 아들들이 어머니의 말대로 했더니, 명당자리의 복 때문인지 연안이씨 가문은 나날이 번성해졌다. 저헌 선생 이후로 월사 이정구(李廷龜) 선생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대표적인 문장가들이 모두 연안이씨였음은 이를 말해 주는 한 예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영일정씨 문중에서는 포은 선생 이후로는 이렇다 할 유명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포은 선생의 묘소와 관련한 이와 같은 이야기는 조선 말기까지도 연안이씨 가문에서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으나, 그후 영일정씨 문중에까지 알려지면서 서로 혼사를 맺지 않을 만큼 반목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모티프 분석
「포은선생의 묘소에 얽힌 유래」의 기본 모티프는 명당 차지하기이다. 명당자리에 대한 탐욕에서 비롯되는 명당 차지하기는, 죽은 사람보다는 살아 있는 후세를 위한 현세적인 관념을 가진 인간의 욕망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풍수설화 중에는 특히 명당 쟁탈형 이야기가 많은데, 명당 쟁탈형은 인간의 욕심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이러한 욕심으로 인해 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경각심을 불어 넣기도 한다.

 

한편, 이 이야기는 구술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사실이 변경되기도 하였다. 포은 선생의 묘가 이장될 당시는 1406년으로 이야기에 실려있는 포은 선생 증손녀나 저헌 선생[1415~1477]은 태어나기 전이었다. 또한 저헌 선생의 부인인 영일정씨는 저헌 선생의 사망 시기보다 32년 전인 1445년에 사망하는 등 실제 사실과는 다른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참고문헌
홍순석·이인영, 『내 고장 옛 이야기』(용인문화원, 1985) 장장식, 「한국의 풍수설화 연구」(경희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2)

 

 

 

포은 정몽주 / 죽을 지언정 꺾이지 않은 충신 / 단심가

 

 

 

 

포은 정몽주 / 죽을 지언정 꺾이지 않은 충신 / 단심가


스승인 이색마저 최고로 평가한 최고의 학자 포은 정몽주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다섯 살 아래인 정도전 또한 그를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는 뛰어난 외교관이기도 했는데 복잡한 국제 관계를 잘 꿰고 있어 명과 일본에도 사신으로 가서 실타래처럼 얽힌 외교 문제를 잘 해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색이나 정몽주는 신진사대부 온건파로 위화도 회군까지는 이성계 일파와 행동을 같이 했는데 창왕 옹립 문제로 분열하게 됩니다. 이색은 창왕을 옹호했지만 정몽주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성계 일파가 창왕을 끌어내리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도 정몽주는 이성계를 두둔했고 심지어 공양왕을 세운 공을 인정받아 공신 반열에 오르기도 합니다.

 

 

 

 

이성계와 등을 돌린 것은 그 다음부터 입니다. 정몽주는 고려의 개혁을 원했지만 나라 자체를 없애는 데는 결사반대했습니다. 역성혁명으로 새 나라를 세우려는 이성계 일파와 뜻이 달랐던 거죠. 하루아침에 동지가 적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마침 이성계가 사냥 도중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치는 일이 발생합니다. 정몽주는 이성계 측근들을 제거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여 정도전은 가둬버리고 조준과 남은등 강경파를 유배를 보냅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급히 이성계가 있는 해주로 달려가 상황을 전했고 그 날로 이성계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정몽주는 이성계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했는데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졌지만 큰 사건은 터지지 않았습니다.

 

[출처] 포은 정몽주 / 죽을 지언정 꺾이지 않은 충신 / 단심가|작성자 똑소정

 

 

 

 

 

 

집으로 가려는 정몽주를 이방원이 붙들어 오랜만에 회포나 풀자며 술자리를 제안을 합니다. 그래서 술자리가 마련되는데 이방원이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하는 하여가를 부르며 함께 새 나라를 세워 백년까지 태평성대를 누리자고 설득을 합니다.

 

정몽주가 답가를 부르는데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로 시작하는 바로 단심가입니다.  새 나라 건국에 반대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고려에 충성하겠다는 뜻을 전달한 것입니다. 포은 정몽주는 신진사대부들 사이에 큰 신망을 얻고 있는 인물인데 그런 사람이 조선 건국에 반대한다면 과연 어떻게습니까?.

 

이방원은 동지로 만들지 못한다면 제거하는게 낫다고 판단을 하였고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제거를 하게 됩니다. 그때 흘린 피가 오늘날까지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기도 합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서 이성계는 공양왕을 끌어내리고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바로 조선이 건국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