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1일(수요일)
평화의 댐으로 가는 길에 들러 본 꺼먹다리의 사연이 이렇게 많은 걸 이번에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다리로 등록문화재 110호 등록된 꺼먹다리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1910.8.22~1945.8.14)연대 1940년대
일제강점기 말에 건설된 화천댐과 더불어 만들어진 꺼먹다리는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와 화천읍 대이리를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교량이다. 나무로 된 상판에 검은색 콜타르를 칠한 모습에서 꺼먹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1940년대에 일제가 교각을 세웠고, 해방 후에는 화천지역에서 군정을 실시했던 소련이 철골을 올렸으며, 한국전쟁 당시에 남한이 다리 상판을 얹어 뜻하지 않게 3국 합작품이 된 묘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파로호 전투로 인해 꺼먹다리에는 아직도 포탄과 총탄 흔적이 남아있다. 당시 전투에서 국군, 유엔군, 북한군, 중공군을 모두 합해 10만여 명이 전사했다. 수많은 전투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건립 당시의 원형을 비교적 잘 보전하고 있는 꺼먹다리는 산업과 교량의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다리에는 군 입대를 앞둔 남자와 그 애인이 다리 양끝에서 출발해 한가운데서 만나면 남자가 군복무를 마칠 때까지 여자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군사분계선에서 20㎞ 떨어진 북한강 상류에 ‘꺼먹다리’라는 교량이 있다. 북한강은 강원도 화천군의 중남부로 흘러 파로호에 이르는데, 꺼먹다리는 파로호 주변에 있는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와 화천읍 대이리를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교량이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만들어진 대형 현대식 교량이었으니, 그 무렵 작은 나무다리만 보아오던 사람들이 일부러 다리품을 팔아 구경을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꺼먹다리는 나무로 된 상판에 검은색 콜타르를 칠한 모습에서 꺼먹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이 ‘검은 다리’여서 꺼먹다리가 된 건지 아니면 다른 이름이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이 다리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전후해 3개국이 건설에 관여한 합작품이기도 하다. 1940년대에 일제가 교각을 세웠고, 해방 후에는 화천지역에서 군정을 실시했던 소련이 철골을 올렸으며, 한국전쟁 당시에 남한이 다리 상판을 얹어 뜻하지 않게 3국 합작품이 된 묘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꺼먹다리는 화천수력발전소와 화천댐, 파로호와 따로 떼어 얘기할 수 없다. 화천댐과 화천수력발전소가 생기면서 파로호와 꺼먹다리가 만들어졌고 파로호와 얽힌 한국전쟁의 역사가 꺼먹다리에도 짙게 배어있기 때문이다.
꺼먹다리와 마찬가지로 간동면 구만리에 소재한 화천수력발전소는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일제가 군수산업 에너 지원으로서 사용하기 위해 건설했다. 경인공업지구 군수공장에 공급할 전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강수력전기㈜가 1939 년 저수량 10억2,000만 t의 화천댐 공사를 시작해 1944년 5만4,000㎾ 1·2호기를 설치했다. 당시는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조선을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 기지로 개편하던 시기였다. 그로인해 수없이 많은 조선인들이 전시동원체제 속에 서 전쟁터와 일터 등으로 강제 동원됐다. 화천수력발전소의 공사에도 강제로 끌려온 3,000여 명의 조선인이 매일 가혹한 중노동에 투입됐다. 별다른 건설장비와 기술이 없던 당시로서는 사람 손으로 무리하게 공사가 진행됐으므로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공사 기간 동안 1,000여 명이 사망해 댐 인근에 2개의 화장터를 운영할 정도였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화천수력발전소가 38선 이북에 있었으므로 북한이 시설운영을 관할했다. 남측은 전력생산시설이 부족했으므로 북한에 의존하던 형편이었으나 1948년 남북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북측은 전기 송출을 중단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양측은 화천수력발전소를 놓고 양보 없는 싸움을 벌였다. 빼앗기고 빼앗는 공방전이 다섯 차례나 벌어졌다. 후퇴와 탈환을 반복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싸움이 ‘파로호 전투, 643고지 전투’였다. 1951년 5월 16일 중공군 30만여 명이 전투에 투입됐고 격렬한 공방 끝에 국군 6사단이 구만리발전소(현 화천수력발전소)를 탈환하며 끝내 승리했다.
전투는 성공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아군의 피해도 컸지만 중공군 사상자가 무려 2만5,000 명을 넘었다. 파로호는 피로 물들었다. 중공군 수천 명이 퇴로가 막히자 파로호를 헤엄쳐 건너다 익사했다. 화천수력발전소를 둘러싼 당시의 전투에서 국군, 유엔군, 북한군, 중공군을 모두 합해 10만여 명이 전사했다. 당시 화천호로 불렸던 곳은 이 전투 이후 ‘파로호(破虜湖)’가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오랑캐를 대파한 호수”라는 뜻으로 친필휘호를 내리며 파로호라 이름 붙인 것이다. 파로호전투로 화천수력발전소의 시설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하지만 일부 발전시설은 살아남았고 문화재청으로부터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9월 14일 등록문화제 제110호로 지정됐다.
화천수력발전소와 8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전투의 중심에 놓였던 꺼먹다리 역시 비록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다리에는 아직도 포탄과 총탄의 흔적이 남아있다. 전방 보급에도 중요한 다리였기 때문에 1개 중대 병력이 다리를 지켰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난간도 없이 일부 침목이 훼손된 채 수십 년간 방치됐다. 1945년에 건설된 꺼먹다는 폭 4.8m, 길이 204m 규모이며 철근 콘크리트 교각이 12m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다. 주각 위에 형강을 깐 다음 각재를 덧댄 가구식 구조이다. 1981년 현 구만교가 준공되면서 폐쇄되었다가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됐다. 2013년 다리와 주변 일대가 전면 보수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전투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건립 당시의 원형을 비교적 잘 보전하고 있는 꺼먹다리는 산업과 교량의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2007년 이후부터 약 27년 만에 일반에 공개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자 다리에는 낭만적이 이야기가 생겨났다. 군 입대를 앞둔 남자와 그 애인이 다리 양끝에서 출발해 한가운데서 만나면 남자가 군복무를 마칠 때까지 여자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방지역에 위치한 다리이니만큼 젊은 연인들의 안타까운 희망이 이야기로 만들어진 것일 게다. 다리에는 차량이 다닐 수 없으며 도보로만 건널 수 있다.
꺼먹다리 주변에는 전설이 가득하다. 화천댐이 만들어지기 전 그곳에는 대붕(大鵬)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었다. 대붕은 하루에 구만 리(里)를 날아간다는, 매우 큰 상상의 새이며 중국 고전 <장자(莊子)> 소요유편(逍遙遊篇)에도 나온다. 대붕의 전설로 인해 꺼먹다리가 소재한 동네 이름은 구만리(九萬里)다. 일제가 화천댐을 건립했을 때 생겨난 호수의 이름도 대붕호였다. 화천 사람들은 이 호수를 대붕호라 불렀다. 하지만 1955년 11월 18일 이후 대붕호는 파로호로 변했다. 이승만 박사가 붙인 파로호란 이름에 대해 일각에서는 “중국군 궤멸을 기념해 지은 원혼 서린 이름”이므로 대붕호라는 옛 명칭을 회복하자는 주장도 있다.
또 다리 인근에 처녀고개라는 고개가 있는데 여기에도 전설이 어려 있다. 옛날 중국에서 한 처녀가 만 리를 걸어 님을 찾아 왔다고 한다. 처녀고갯길에서 처녀가 화천으로 가는 길을 물었는데 구만리를 지나가야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처녀는 만 리나 걸어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왔는데 또 구만 리나 가야 한다는 말로 알아듣고 절망한 나머지 그만 목숨을 끊고 말았다. ‘질거내미고개’라고도 부르는 처녀고개와 간동면 구만리(九萬里)라는 이름에는 이런 얄궂은 사연도 있다.
https://ncms.nculture.org/legacy/story/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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